샛바람과 옥낭각시베짜는바위 그리고 바위취
어스름 하늘에 송이구름 뚫은 아침 햇살, 샛바람이 찾아와 겨울잠 자던 날 깨우네. 추운 겨울에 익숙해져서 늦게까지 다방골잠 자려했는데, 포근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눈이 떠졌어. 돌켯잠 조차 허락하지 않아 화를 내려했는데, 귓전을 울리며 내 품으로 기어들어오는 샛바람 "잠꾸러기 바위취! 어서 일어나야지 늦었잖아". 곁에서 조용하던 너럭바위도 한마디 거들었지."샛바람은 여우도 울린단다. 이제 일어나렴" 그 소란에 우리 무리 모두 깨어났어. 겨우내 축축한 바위 그늘에 숨어 지냈는데, 꽃을 피울 때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긴 하지. 움트고 싹 내고 붉은 갈색 털을 보듬으며 어수선을 떨었지 뭐야. 그런데 날 깨운 심술쟁이 샛바람은 그렇다 치고 아무 상관없는 바위는 왜 바람 편을 드는 걸까?
며칠뒤 나물 캐던 아낙들이 바위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다가 그 궁금증이 풀렸어. 아주 먼 옛날 이 바위에서 베 짜던 옥랑각시를 흠모한 총각이 그녀를 쫓아왔는데, 놀란 그녀가 하늘로 올라갔고 나날이 하늘 향해 애타게 울던 총각은 샛바람이 되었어. 바람이 된 총각은 봄이 되면 그녀가 베를 짜던 이 바위를 찾아왔다 가는 거야. 바위는 바람이 된 총각이 안쓰러워 말을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있던 거야. 듣다 보니 애잔한 마음이 들어서 샛바람이 안쓰러워졌지. 봄마다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을 서러움을 안고 찾아오면 침묵으로 맞이해 준 바위. 바람은 베 짜는 소리가 되었고 바위는 그녀의 소리 없는 미소가 된 것 아닐까? 날 깨운 바람은 그녀가 머무르던 이 바위에 꽃이 가득하길 소망한 것 같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허망한 것일까? 바람에 흩뿌려진 내 향기는 바위에 잠시 머물겠지만, 샛바람은 그 향기를 전하지 못해. 그는 언제나 그랬듯 여름이 되기 전에 떠날 테니까. 그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서둘러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거야. 봄이 끝나갈 때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여.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시린 한기를 몰아내며 바위에 머물던 그에게 하트잎을 흔들며 환호해 주었어. "넌! 멋진 바람이야! 우리 또 보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떠났지만, 쓸쓸함 대신 추억과 기다림이 생겼어. 꽃이 지면 연기처럼 사라진 아름다움이 안타까울까? 아니야 꽃잎이 바스러지도록 품은 씨앗이 겨울을 달래고 봄을 맞이하겠지. 그래! 내가 보지 못하고 이루지 못해 다해도 허망한 것은 아니야.
샛바람 떠난 자리 뜨거운 마파람이 채워졌어. 그런데 바람 따라 시간은 흘러가는데 바위는 샛바람 찾아오는 봄을 기다리지 않더라. 베틀 짜던 자리는 이미 꽃이 되었거든. 사람이던 바람이던 찾아오면 언제나 자리를 내어주고 기쁨을 찾으면 웃음이 되고 슬픔이 머물면 그대로 슬픔이 된다고 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위가 샛바람을 편들어 주었어도 하늘로 올라간 옥낭각시를 변함없이 그리워한 것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이 자리를 지켜낸 바위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 천년을 바람에게 들은 귀가 아무 대꾸하지 않고 듣고만 있을 수 있었을까? 마을사람들이 샛바람이 된 총각이 아니라 각시가 베를 짜던 이 바위를 옥낭각시베짜는바위라고 부르며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 거야.
내 꽃말은 절실한 사랑이야. 샛바람과 바위 곁에서 그들 이야기에 빠져 있다 보니 내게 미안해지는 맘이 들어. 난 얼마나 그들만큼 간절했었던 것일까? 스펀지가 떠올랐어. 원하는 것은 짜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내 맘을 사랑하는 이에게 밀어내지 말고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절실한 것 아닐까? 샛바람과 바위 누가 더 절실한지 너희도 한번 고민해 봐. 너희가 어찌 생각하던 난, 바위와 바람이 곁에 있어 맘이 든든해. 귓가에 샛바람과 바위의 잔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