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장맛비가 아침부터 투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며 줄무늬로 치장한 너른 둥근 잎들이 출렁인다. "비비추야! 졸려 죽겠어. 피곤한데 왠 비야?" 옥잠화가 날 보고 구시렁대자 "넌 밤마다 축제구나! 어젯밤은 어땠니?" "글쎄? 내 향기가 좋아도 벌과 나비가 잠자는 밤은 고요해. 바람 불 때 꽃잎을 돛인 양 펼쳐서 꽃가루를 날려 보내느라 바쁠 뿐이야!" 비비추는 소나무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먼 옛날 여름밤, 목동이 불던 피리소리에 흠뻑 빠진 선녀가 목동에게 옥비녀를 선물했는데, 안타깝게 비녀를 떨어뜨렸지. 비녀는 사라지고 선녀 향기를 품은 옥잠화가 밤마다 연인을 찾듯 꽃가루를 바람에 흩뿌리게 되었지" 옥잠화를 바라보니 밤에 피었던 꽃은 이미 지고 새로운 꽃봉오리가 봉긋하게 솟아오르고 있어. 잠꾸러기 같아도 제 할 일은 다하는 친구야.
우린 백합과 친척인데 내겐 다른 이야기가 있지. 전쟁이 잦았던 신라시대, 백성들은 국경에 성을 쌓는 노역에 동원되곤 했어. 몸이 약한 아버지가 먼길을 가게 되었는데, 딸은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몰랐어. 그녀를 사랑하던 동네 청년이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나선 거야. 청년이 고마웠던 그녀는 그가 돌아오면 혼인을 올리기로 약속했어.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도 청년은 소식조차 없었지. 아버지는 딸을 생각해서 그만 잊자고 했어.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그녀는 마당에 비비추를 보며 이 꽃이 지면 아버지 뜻을 따르겠다고 했지. 그런데 여름 내내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마지막 꽃만 남았을 때 거짓말처럼 청년이 돌아온 거야. 물론 그 둘은 혼인을 했고 행복하게 살았다지. 결말이 다른 이야기인데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안타깝지. 하지만 사랑을 주지 못하고 받기만 하려는 것을 더 슬퍼.
옥잠화 꽃말은 아쉬움이고 내 꽃말은 하늘이 내린 인연이야. 피리 불던 목동과 선녀처럼 인연은 하룻밤에 사라지기도 하고 신라시대 연인처럼 어렵게 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하지. 속마음을 볼 수 있다면 우린 더 진실할 수 있을까? 느끼지 못해 인연이 없다고 한탄하거나 후회하는 이도 있으니까 말이야. 향기롭게 핀 꽃은 내일도 피어있을 것 같았는데, 하룻밤 사이 져버렸어. 그래서 끝인가 싶었는데, 잉태된 씨앗이 바통을 터치하듯 꽃을 피우더라고. 인연은 길이도 다르고 깊이도 다르지만 영원히 머물지도 않으니 소중한 인연이라면 정성을 다하는 것이 맞겠지.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옥잠화와 난 옛 인연을 가슴에 묻고 깐깐오월, 미끈유월, 동동팔월을 보내고 있어. 여름이라는 뜨거운 무대에서 달과 해를 따라 잎이라는 옷을 입고 꽃이라는 향기를 품었지. 새로 태어날 인연을 기다리는 거니까 설레고 기다려져. 이 마음은 과거에도 그랬듯 한동안 머물렀다 다시 흘러갈 거야. 그칠 듯 말 듯 시비 걸며 얄밉게 내리는 잠비가 실바람에 춤을 추네. 달님과 해님 그 둘이 버틴 세월처럼 우리 인연도 그렇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 좋겠어.
임우(霖雨)
한 방울, 두 방울
소슬히 떨군 빗물.
내 곁에 머문다.
동뜨게, 도뜨게
사연이 맺힌 창문.
하늘을 담는다.
마른 듯, 지운 듯
현실도 잊힌 혹염(酷炎)
그대를 그린다.
더위를 가르고
슬픔을 담은 그대.
맹추(孟秋)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