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오후, 노랑붓꽃이 우울해 보여서 "무슨 일이 있어?" 하고 묻자 "지나는 이들이 날 보고 '슬픈 소식'이라고 손가락질하며 피하는 거 있지? 보라색 꽃을 피운 널 보면 '좋은 소식'이라며 반가워하는데..." 꽃봉오리가 먹물을 머금고 있는 붓을 닮았다고 붓꽃이라고 부르는데 꽃 색깔에 따라 사람들은 의미를 달리두고 있어서 노랑붓꽃이 불만을 이야기한 거야. 난 그를 위로하며 "넌 사람 변덕을 모르니? 보라색을 보고 우울하다니 고독하다니 하는 이들도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아" 노랑붓꽃은 얼굴을 찡그리며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기분이 나쁘다고!" 노랑붓꽃에게 타이르듯 "글 잘 쓰는 이는 먹을 갈며 뜻을 세우지 붓이 좋네 아니네하며 고르지 않는데 우리가 피운 꽃에 무슨 색깔 타령일까? 씨앗을 맺길 소망하는 단 하루, 혼을 담은 몸짓으로 피어난 네게 이러쿵저러쿵 어찌 그리 말이 많은지 모르겠어. 우리가 색을 가려 핀 게 아니지 않나? 게다가 소식이란 말엔 좋고 나쁨이 없어. 우리가 봄 가뭄과 여름 장마를 겪으며 물을 보는 감정이 달라졌던 것처럼 소식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이야. 세상엔 겪지 못한 일들이 넘쳐난다는 것이 나쁜 소식이고 좋은 소식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거라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린 꽃을 피웠잖아!"
난, 서울 창포원 붓꽃원에서 태어났어. 자라기에 너무 쾌적한 곳이지. 물이 부족할 일도 없고 괴롭히는 그 누구도 없지. 그런데 화분에서 크는 식물은 그 크기만큼 자란다는 것을 아니? 처음에는 그 벽을 넘어서려 해도 점점 포기하고 화분 안에 머물게 돼. 나 역시 마찬가지야. 이곳은 화분보다 넓고 자연스러운 곳이지만, 간절함이 부족하다 보니 무언가 참고 버틴다는 것을 종종 잊어. 그러니 노랑붓꽃처럼 남들이 저를 어찌 생각하는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거지.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도봉산 숲에 각시붓꽃이 있는데 그녀가 자리 잡은 곳은 척박한 데다 키도 꽃도 작지만 이르게 봄꽃을 피워서 오가는 이들에게 봄소식을 전하고 있지. 힘들게 피워낸 모습으로 봄을 직접 보여주는 기쁨은 얼마나 좋을까? 봄소식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메아리처럼 퍼지는 것이 부러워. 이것이 전하는 이도 기쁜 소식, 바로 우리의 향기가 아닐까?
그런데 같은 소식이라도 듣는 이에 따라 달리 받아들이기도 해. 고대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마라톤 벌판에서 싸워 이긴 뒤에 그 소식을 전하고자 40km를 쉬지 않고 달려와 "우리가 승리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기뻐하라"라고 외치고 죽은 병사가 있어. 그의 죽음으로 생긴 올림픽 마라톤은 패전한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에선 지금도 마라톤 경기를 하지 않아. 이란에겐 과거의 일이라도 아픈 상처가 되기에 그 잔치에 끼고 싶지 않은 것이지. 이처럼 처지가 달라 느끼는 감정이 달라지기도 해.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도 다른 감정이 맞서기도 해. 더워진 날씨로 남쪽에서 자라던 후박나무를 볼 수 있어 반가웠지만 서늘한 것을 좋아하는 구상나무가 사라져서 슬퍼졌거든. 그래서 말을 전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지.
모르는 것이 약이 된다고 하는 말이 있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기도 하니 모른 척 내버려 둘까? 물론 마음의 평온을 위해 듣고 싶은 소식이라도 찾거나 갈구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일 수도 있어. 빈 골짜기의 발자국 소리처럼 뜻밖의 기쁨이 찾아오면 더 반갑게 느껴지기도 할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요즘처럼 옆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사는 세상에 가만히 있는 것은 나로선 반갑지 않아. 감감무소식 답답하지 않아? 난 함께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며 살고 싶어. 소식은 소식일 뿐 숨 쉬며 사라질 때까지 그리 전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