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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Sep 29. 2024

아비의 잃어버린 사랑, 범부채

"띠놈 띠놈야 이놈아 저리 가라 띠놈” 범을 쫓는 소리가 깊은 산속 고갯자락에 울린다. 범에게 아이를 잃은 아비의 한맺힌 절규는 쇳소리가 되었다. 천운으로 아이가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소망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사그라든다. 그 곁에서 얼룩덜룩한 무늬를 박아놓은 노란 범부채의 마음은 먹먹하다. 숲이 짙으면 범이 든다는 아비 말을 허투루 듣고 숲에 들어갔다가 범에 물려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꽃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비를 향해 "저 여기 있어요!" 외쳐도 누구도 소리를 듣지 못하기에 지쳤버렸다. 늦게 얻은 막내아들이 첫아들이라 옥이야 금이야 소중히 키운 것을 알지는 못한 철없는 아이라도 제 아비의 울음에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시간을 되돌릴 길은 없었다. 

범부채(Belamcanda chinensis)는 붓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사간(射干)이라고도 부르며 산과 바닷가에서 1m 정도까지 자라며 한여름 꽃을 피워 가을에 열매가 익는다. 

범부채는 자신처럼 어른 말을 듣지 않고 숲에 들어오는 아이를 쫓기 위해 범 무늬를 꽃을 피운 것이다. 숲에서 흔들리는 호랑 무늬 꽃을 보고 범이 나타난 줄 착각하고 놀라 돌아가길 바라는 것이다. 동네 아이들 몇이 이곳에 왔다가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것을 보고 배꼽 빠지듯 웃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너흰 내 덕분에 산 거야!' 하며 흐뭇하게 바라봤다. 집에 돌아가서 범을 봤다는 이야기를 부모에게 하면 혼쭐이 나서 다신 이곳에 얼씬거리지 않을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귀로만 듣던 세상을 눈으로 겪으면서 아이들은 하나 둘 세상 무서운 것을 알아간다. 벌써 수백 년 전의 일이지만, 어제처럼 선명한 기억이다. 요즘 그 무섭다는 범도 동화책이나 동물원에 가야 볼 수 있으니 아이들은 범의 무서움을 느끼지 못한다. 평화로운 나라의 아이들은 생명의 위험을 느끼 지지 못하는 범 보다 보이지 않는 귀신과 괴물을 두려워한다는데, 전쟁의 슬픔과 고통을 겪는 나라 아이들은 전쟁과 테러를 가장 무서워한다. 범에 죽은 나도 전쟁으로 죽은 소중한 생명도 되살릴 수 없으니 범과 전쟁은 같은 것일까? 그런데 그 무서웠던 범은 보기 힘들어졌는데, 전쟁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돌돌 말려진 꽃이 펴지면서 꽃을 피우는데 그 피는 순간을 볼 수 있다면 완벽한 예술이다.  그렇지만 피어난 꽃은 하루를 넘기지 못해서 아쉽긴 하다.

사그라질 것 같지 않게 무덥고 서글펐던 여름이 간다. 아침저녁 찬바람에 긴 꽃대 끝에 마지막 남은 한송이 범부채는 실없는 부채손이 되어 공허하게 흔들린다. 여름이 올 때마다 아비가 찾아와서 자신을 물고 간 범을 쫓을 것 같은 환상에 빠지지만, 이미 그 아비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이다. 사람들은 범보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모기를 더 무서워한다.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범 닮은 꽃을 피웠던 기억도 흐릿해지고 사람들에겐 보기 힘들어진 범을 추억하는 꽃이 되어버렸는데 그것도 괜찮다. 아비가 목놓아 우는 모습을 보고 뿌리와 잎에 목의 염증을 다스리는 소망 담았으니 누군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누리지 못하고 잃어버린 그때를 떠올리면 슬픔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마음을 다스린 것은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부터이다. 장에서 아비가 사준 신발을 신고 기뻐서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를 뛰어다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사랑은 범이 물고 사라진 것도 슬픔 속에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행복은 코에 걸친 안경과 같아서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행복을 누리지만, 그것을 잃어버린 듯 찾기 시작하면 모든 순간이 불행하다. 메아리와 무지개는 손으로 쥐고 만지려 하면 얻을 수 없지만 듣고 보는 것으로도 만족하면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늘 주어지고 늘 곁에 있는 듯 익숙해진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범부채는 차갑게 다가온 가을바람 뒤에 겨울의 익숙한 체취를 느꼈다. 그 겨울이 오지 않는다면 뜨거운 여름 아비의 사랑을 만나지 못할 것을 안다. 그 사랑을 만날 기쁨에 이번 겨울은 유난히 뜨겁게 다가왔다.

검고 윤기나는 열매가 아름다워 blackberry-lily 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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