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2020년 봄 나딸리. 아니 내 사랑 나딸리
그녀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녀의 깊고 맑은 심연이 떠오른다. 내가 정말 아끼는, 사랑해마지 않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부다비는 나에게 지금의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만난건 2020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하와 민하가 아미티에 다니기 시작한지 반년이 되었을때였다. 아부다비 국제학교들은 보통 7시 50분에 일과가 시작해 2시 50분쯤이면 마친다. 아침에는 학교 앞에 차로 아이들을 교문 앞에 내려주고 픽업할때는 보통 교실 앞에서 한다. 그래서 교실, 복도가 북새통을 이룬다. 그 날은 민하를 먼저 픽업하고 주하의 교실 앞에서 담임과 이야기하며 가방을 챙기는 주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전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 하나와 그의 부모로 보이는 길고 늘씬한 남녀가 이를 활짝 드러내고 내 옆을 스쳐갔다. 첫날이라 조금 헤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의 '오지랖이'가 쑥 손을 내밀었다.
"전학 왔나봐요?"
내가 운을 뗐다.
"네! 벨기에에서 온지 이제 일주일도 안되었답니다."
약간의 불어억양이 들어간 유창한 영어.
"저는 같은 반 주하엄마, 혜경이라고 해요. 혹시 도울 것이 있으면 연락주세요. " 말하면서도 가슴이 콩닥였다. 내가 딱히 도와줄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도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다.
"아. 너무 고마워요. 아직 집도 못구했어요."
나딸리가 말했다.
"네. 저는 라하비치 알제이나에 살아요. 혹시 제이나가 궁금하면 아이들과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나의 '오지랖이'는 벌써 집에 초대까지 하고 있네?
그리하여 나딸리 가족이 정말 우리집에 놀러 오게 되었다. 그날을 기억한다. 1월은 아부다비에서는 계절의 여왕, 따뜻하고 바삭한 날씨에 야외활동을 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그 날도 쨍한 해가 내 마음의 구석진 곳까지 비추어 밝혀 줄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아부다비 제이나 우리 집 1층 마당에는 카르푸에서 산 6인용 야외 테이블 세트가 있었다. 사실 처음 몇 달을 제외하고는 잘 쓰지 않았었다. 아부다비의 모래바람으로 이틀에 한번은 테이블과 의자에 잔뜩 쌓인 모래를 떨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유리 테이블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라탄조직모양의 의자에 끼인 모래를 호스물로 씻어내는 일은 처음엔 재밌었지만 귀찮고 힘들어 주기적으로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나딸리가 온다는 것을 알고 나는 곳곳에 켜켜이 쌓인 모래들을 몇 일에 걸쳐 말끔하게 닦아내었다. 나딸리가 도착했다. 그녀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그것을 벗으려면 아주 복잡하게 묶여있는 끈을 풀어야했다. 우리 집 안에 들어오기 위해 몸을 숙여 신발의 끈을 풀고 있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나딸리는 '아, 실내에 들어가면 당연히 신발을 벗어야지.' 하고 말하며 어느새 불편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성숙하고 다정한 여성이라는 나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우리 야외 테라스에서 이야기 나누어요. 커피 마실래요? 차도 있어요.' 하고 내가 나딸리 부부에게 물었다.
그들은 미리 약속이나 한듯 입을 모아 '저희는 커피 안 마셔요. 차 마실게요.'라고 한다.
데이츠(대추야자) 몇 알을 가운데 놓고 작은 티타임을 가졌다. 나탈리는 벨기에 초컬릿과 직접 구운 마들렌을 가져왔다. 우리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새 햇살이 어느새 테이블 위 벨기에 초컬릿을 녹이고 있었다. 아부다비는 1월 겨울이라고 해도 해는 아주 강하다. 초컬릿을 다시 냉장고에 넣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의 가족은 벨기에의 남부지방에 살다가 아부다비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은 관제사, 그녀는 전직 승무원이었다. 독특하게도 그녀는 태국에 2년동안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 그래서 태국어도 할줄 알고 그녀 남편 둘다 영어도 곧잘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언어 사이를 뚫고 나오는 맑고 따스한 영혼이 은은히 내 주위를 감싸는것 같았다. 온화를 넘어, 포용적이면서도 단단한 성품이 그녀의 말 속에서 느껴졌다. 그들의 자녀는 주하, 민하와 나이가 같은 여자아이 둘. 라하구역의 몇 개 아파트를 둘러보는 중인데 아마 '라 마르'로 정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나는 우리 가족도 1년 전 제이나로 이사를 왔는데 이 곳 제이나가 살기 좋으니 나딸리도 여기로 오면 좋겠다고 혼자 들떠 있었다. 그렇게 재잘재잘 즐겁게 떠들다 우리의 첫 티타임은 끝났다. 그 후 한달 뒤 그녀는 나의 앞 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우리는 이웃이 되었다.
그녀는 처음에 제이나 B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녀의 집엔 유난히 부모님과 가족들이 벨기에에서 자주 방문했다. 딸들을 등교시키고 그녀의 집에 티타임을 하러 간 어느 오전에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와 계셨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나이도 있으신데 영어가 유창하셔서 대화가 잘 이어졌다. 외국어는 이렇게 서로 다른 국적과 문화와 세대를 이어주니 참으로 신통방통하다고 생각했다. 나딸리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그녀의 시어머니와 꽤 진지한 대화를 했다. 내가 나로 있어야 하는 시간의 중요성과 느리게 사는 것의 소중함, 예전에 듣던 음악을 최근에 다시 들을 때 내가 받은 위로 등에 대해서 세대를 뛰어넘어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를 보고 나딸리가 차를 내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영원같던 순간, 순간같던 영원을 느낀 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이 보이는 것보다 위대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그 후 나딸리는 머지 않아 자신의 솦(Soap) 브랜드를 런칭했다. 환경에 늘 관심이 많던 그녀가 유기농 주방세제, 세탁세제, 바디제품까지 아우르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출범했다. 그녀가 무엇을 하던 늘 응원해주고 싶던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커피를 마시며 울다가 그녀의 새로운 브랜드 이름을 같이 브레인스토밍하고 기획하고 이름하야 'Nat'uarally Now'라는 이름을 만들게 되었다. 그녀의 네츄럴리 나우는 로고를 만들고 제품을 직접 생산해서 판매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는 C동에 집을 구매했다. 그리고 샤 왈마라는 고양이도 키우기 시작했다. 샤는 프랑스어로 고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샤왈마는 공교롭게도 또띠아 같은 빵에 싸먹는 아랍식 간식이다. 나딸리네 고양이는 왈마라는 고양이가 되었다. 나딸리의 고양이답게 왈마는 그녀의 집 안팎을 오가며 자유롭게 다녔다. 하지만 늘 밤이 되면 다시 그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신기했다. 고양이까지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걸까? 가끔은 그녀의 테라스에서 꼬랑내 나는 치즈인 '그뤼에르'에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그뤼에르는 나의 최애 치즈가 되었다. 꼬랑내 속에 감추어진 감칠맛은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은은한 달빛에 그녀와 테라스에서 나눈 이야기는 단연 나의 인생 대화다. '당신이 옳다' 라는 정신과의사 정혜신 박사의 책이 있다. 그 책의 내용보다도 제목 때문에 나는 그 책을 오랜동안 내 책장의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한마디로 '당신이 옳다'였다. 나의 모든 감정과 생각과 찌끼마저도 그녀는 옳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충분히 느끼고 아껴주라고 했다. 만날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어둠의 터널의 지나는 것같은 나의 절망적인 2022년에도 그녀는 한결같이 나의 지나간 모든 결정과 감정은 옳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라고 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온 우주가 나를 안아주는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아부다비에 함께 살 때의 일이었다. 아부다비에서 만난 프랑스 사람들도 한국인들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곤 했는데 그중 나딸리와 가장 결이 비슷한 참된 친구가 하루 아침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오래 슬퍼하는 그녀를 지켜보는 것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나딸리는 나딸리다. 겉으로 보기에 유연하고 부드러운 성격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은 그 누구보다도 단단했다. 그녀는 그 시간을 잘 견뎌내었다. 많이 아파하고 끝없이 애도했다. 그녀의 남은 가족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지만 불쑥 불쑥 올라오는 친구의 부재가 송두리째 그녀를 흔들어 놓을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의 남편 프랑스와나 내가 또 다른 주변 사람들의 보살핌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서서히 그 일을 잘 겪어내며 지나갔다.
나딸리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아부다비를 떠났다. 남편인 프랑스와가 스위스에 직장을 구했기 때문이다. 아부다비의 집을 팔고 스위스와 인접한 프랑스의 아주 작고 한적한 곳에 집을 사서 그곳으로 떠났다. 그녀의 부재는 나에게 또 하나의 상실을 안겨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깊이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우리의 우정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혜경, 너를 만나기 위해 나는 아부다비에 왔나봐. 이 곳이 나와 아주 잘 맞는 건 아니지만 이 곳에서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아. 우리 여기를 떠나서도 계속 함께 하자.'
그러면서 나에게 목걸이를 하나 건네었다. 알약같이 생긴 펜던트에는 점이 세개 찍혀 있었다. 하나는 떨어져 있고 두 개는 붙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하나의 점은 우리가 홀로 존재할 때야. 하지만 잊지마 그 순간에도 나는 너와 함께야.' 나딸리가 가장 나딸리스러운 말을 했다. 나는 또 팡하고 터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엉엉 울고 말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때면 땅에 큰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와 대화를 할때면 함께 울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그 큰 나무에 기대고 싶어 지기도 한다. 나도 그녀도 마음 한구석 여린 곳을 건드려질 때면 잘 울기도 하여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자주 울곤 했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감동해서다. 나랑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아름다운 생각에 같이 감동하고 지금 이순간이 아름다워서, 내 주변의 사람들이 아름다워서 우리의 아이들이 아름다워서, 모든 것이 때로 너무나 아름다워 우리를 울게 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든 그녀를 만나면 내 마음을 다 꺼내놓고 울고 싶어질것이다. 그녀 또한 그러하리라. 우리는 자주 만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작은 실가닥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의 가슴 한구석을 내어주고 마음 한켠에 늘 자리하고 있는 사이니까. 다시 돌아와도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같은 나탈리다. 언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2024년 여름에는 스위스에 갈뻔 했다. 2024년 8월 여름 아부다비 여행으로 가는 길에 경유할 곳 중 스위스가 물망에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벨기에에 있었다. 그녀에게도 힘든 일들이 닥쳤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그녀를 위로할 차례다. 하지만 벨기에에 가지는 못했기에 왓츠앱으로 또 음성을, 영상을 주고 받으며 힘든 시간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그녀를 다시 만날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30년 아니 40년, 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나딸리는 멋진 나의 나딸리다. 내 영혼의 구도자인 그녀가 오늘도 안녕하기를. 꼭 다시 만나자, 나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