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흔들리는 마흔을 견딘 시간, 아부다비

2-3 2019년 가을 내 생애 최고의 선생님, 미스 엠마

나의 첫째 아이 주하는 참 선생님 복이 많다. 7살 때 차 선생님으로 시작해서 월내초등학교 1학년 때 양 선생님, 그 이후 아부다비에서 만난 GAA G1 산드라, AIS4 마크, Y5 해리엇, Y6 레이첼 선생님까지 한결같이 좋았다. 하지만 Y3학년때 미스 엠마 선생님은 그 중에서도 참으로 특별했다. 그녀와 보낸 1년은 감동의 나날, 연속이었고, 나에게는 같은 교사로서 감탄과 영감을 불어넣어 준 날들이었다.


교사는 학생에게 수업 내용을 잘 전달해야하는 일차적인 역할이 있다. 그리고 그 전달에 있어 아이를 대하고 소통을 위한 이차적인 역할이 있다. 이 두 가지를 운용하는 모습은 교사마다 제 각기 다르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가지의 역할을 늘 감탄이 나올정도로 완벽하게 또 인간적으로 훌륭하게 해 내었다. 내가 그녀의 교육스타일을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게 된 것은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학습 덕분이었다.


2020년 1월 난데없이 코로나가 닥쳤다. 아부다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날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세컨더리(영국계 학제의 중,고등학생) 강의실에서 아미티 동료 유나 선생님과 대화중이었다. 정확하게는 새롭게 일하게 된 아미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핸드폰에 '띠링' 하고 알람이 울렸다. 유나 선생님이 말했다. 1월 2주부터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될거라고. 그 망할 코로나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이 이제 막 아부다비에 적응하려나 할 때였다. AIS에서 봉사활동을 한지도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모든 것이 다 막혀있는데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니, 외국까지 와서 이렇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답답하고 아쉬웠다. 아부다비의 빡빡한 코로나 규정에 견디다 못해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가족들도 속속 발생했다.


그러나 코로나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학생들은 집에서 학교 수업에 참여해야만 했다. AIS에서는 학생들의 온라인 학습을 위해 시소(Seesaw)라는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등교하듯 시소에 접속한다. 시소에 접속하면 교사가 올린 동영상들이 하루 일과 순서로 펼쳐졌다. 학생들은 동영상을 보고 수업의 내용을 각자 학습하고 각자 한 것을 교사에게 보낸다. 과목에 따라 실시간으로 접속하여 수업하는 시간도 있었다.


주로 1교시와 마지막 교시는 실시간 접속 수업이었다. 아침 수업에는 교사가 아침 인사를 하며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어주었다. 일과 중에는 교사가 올린 프로젝트 아래에 학생들이 각자 자신의 과제를 업로드하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했다. 마지막 교시에도 실시간 수업으로 얼굴을 보며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 마침 인사를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Shout out' 시간인데, 매일 한 명의 학생을 정해 그 학생이 한 과제를 전체에게 보여주고 잘한 점을 칭찬 해주었다. 일과 중 주어지는 프로젝트 과제는 주로 집에 있는 A4용지나 공책, 화이트 보드에 활동을 하고 그것을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은 다음 업로드 한다. 그러면 교사가 학생의 활동마다 확인을 하고 피드백을 준다. 과제를 빨리 끝낸 학생에게는 챌린지라는 심화 과제를 내주었다.


온라인학습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나는 이때다 싶어 딸들 옆에 찰싹 붙어 앉아 함께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주어진 과제를 내 과제인양 같이 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딸아이들에게 그동안 빈약한 부분을 채워 학교 수업을 따라갈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과제를 하다 실수를 하거나 부족해 보이면 나는 매섭게 아이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화가 났다. 제대로 아는게 없어 보이는 아이를 보는게 화났고, 아이를 그런 상태로 방치한 내 자신에게 화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나아질리 없는 현실에 화났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내가 있어서 늘 긴장했고 기분이 상해서 아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해냈다. 협업 과제에도 나는 온라인에서 만난 주하 반 아이들과 주하 대신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내가 조장이 된 것처럼 과제를 이끌고 나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져 있었고 주하는 선을 넘나들며 자신의 학습에 도움을 준답시며 실제로는 방해하는 엄마를 포기했고,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나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그렇게 가시방석같은 주말을 보낸 후 아이들의 수업 장소를 각자의 방으로 옮기는 결정을 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딸들은 방에서 온라인으로 반 아이들과 선생님을 만나 아침 인사를 하고 나는 거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마시려 하고 있었지만 귀는 아이들의 방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말내내 기가 죽어있던 아이가 아침 인사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방문 밖으로 흘러나왔다. 갑자기 머리를 둔탁하게 한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지난 일주일 내가 딸에게 줄 수 없었던 세상이 환해지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의 웃음소리였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걸까? 그 길로 나는 과감하게 아이의 학습에서 빠지기로 마음먹었다. 대신에 아이가 공부하는 시간과 노력에 부끄럽지 않도록 나도 내가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아이가 공부하는 시간에는 나도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했다. 그 중에서도 공부하는 시간을 늘렸다. 나도 무언가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아이와 다를 것이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쉬워보이는 것도 막상 직접하면 어려움을 공감하게 마련이니까. 나는 아이와 같은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엄마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교도관 대신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딸들을 학교에 데려다 준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두 아이방으로 등교를 시키고 나는 내가 할 일들을 했다. 무얼하는지 궁금했지만 아이는 혼자 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나는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학습의 주도권을 넘기니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딸들은 훨씬 더 적극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친구들과 피드백을 주고 받고 있었다.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방법으로. 그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 답답하지만 멀리서 떨어져 지켜보니 비로소 성장이 눈에 보였다.


첫째 주하의 당시 담임 선생님은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엠마였다. 영어로 선생님을 부를 때 Ms(미스)라고 부른다. 결혼 유무에 관계없이 여성을 존중하여 부를 때 쓰는 호칭이 '미스'다. 주하의 담임은 미스 엠마였다. 그녀는 당시 20대 중반의 나이로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에서 2년 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UAE에 넘어온지 2년이 막 넘은 때였다. 그녀도 AIS에서의 첫해였다. 그녀를 만나던 날을 기억한다. 발목까지 오는 버튼식의 검정색 폴카닷(Polka dot-땡땡이)원피스에 약간 마른 자그마한 체구, 6센티미터 가량의 토 오픈 검정 스트랩 구두(발가락이 드러난 끈으로 된)를 신고 있었다. 또 어깨를 조금 넘는 붉은 빛이 도는 머릿칼을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AIS에서는 새학년이 정해지고 나면 Meet the teacher(선생님과의 만남)이라고 해서 대략 20분정도의 시간을 미리 잡아둔다. 학생들은 해당 날짜에 부모와 함께 새로 진학할 교실에서 가서 교사가 준비해 둔 간단한 활동들을 하며 교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교사는 주로 곱셈 퀴즈라던가, 간단한 그리기 도구 등을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놓고 학생들을 관찰한다. 동시에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학생이나 학부모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도 한다. 그날 나의 뇌릿 속에 기억된 그녀의 모습은 '밝음' 그 자체였다. 인간 해바라기라고나 할까. 보고 있으면 노오란 햇빛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상냥했다. 이런 선생님이라면 주하를 잘 보듬어 줄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진면목은 온라인 수업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아침에 일어나 온라인 학습프로그램인 시소에 접속하면 그녀가 미리 올려놓은 하루 일과 안내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학생들을 그것을 열어 과제를 확인하고 하나씩 수행해서 해당 프로젝트 아래에 댓글에 업로드한다. 그러면 미스 엠마는 학생의 과제들을 점검하고 적절한 피드백을 준 뒤 심화과제를 내거나 보충과제를 주거나 하는 식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감동을 받은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그녀의 피드백은 매우 빠르고 적절했으며 정확했다. 그리고 꼭 개별로 심화 또는 보충과제가 주어져 학생 개개인에게 들어맞았다. 게다가 간혹 딸이 올린 과제에 대한 음성 답변이 달리기도 했는데 그 음성메시지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Anyonghaseyo(안녕하세요)!' 그녀는 어디에서 검색했는지 한국어로 아이에게 음성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아부다비에 정착한지 채 1년이 안되었던터라 주하는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미스 엠마는 그것을 잘 알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주하의 마음까지도 도닥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주하는 아부다비를, AIS를, 영어를,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영어로는 도움을 준다는 표현을 'Stretch(스트레치)'라고도 한다. 내가 있는 위치에서 손을 뻗어 상대에게 다가가는 행위이다. 나의 속도와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상대에게 다가갈 수 없다. 교사로서 그녀를 보며 참 많이 반성했다. 나는 언제나 학생들이 나에게 스트레치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른이고, 교사고, 권위가 있는 사람이니까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어린 스트레치를 보며 나도 한국에 돌아가면 꼭 나의 학생들에게 같은 자세로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전에 나의 딸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스트레치를 적용해 보려고 노력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색, 온도, 속도가 있다. 타인과 소통하려면 그 사람이 지닌 위의 특성들을 잘 알고 그들과 함께 하는 순간에는 적어도 그들과 섞이고 녹아들기 위해(블렌드인 ;Blend-in) 노력해야한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그러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 아무리 능력과 실력이 뛰어나도 주변과 그렇게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도태되는 것을 보아왔다. 그녀는 나보다 어리지만 내가 배울 것을 한아름 안겨준 어린 선배였다. 미스 엠마는 '어머니가 누구시니? 너를 어떻게 키우셨니?'라는 박진영의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내 딸들이 그녀처럼 컸으면 했다. 현명하고 단단하게, 그러면서도 다정하게.

그런 그녀를 운좋게 한국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공교롭게도 우리가 아부다기를 떠날 때에 함께 그 곳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이 아닌 싱가폴의 유명 국제학교에 새로운 잡 오퍼(Job offer- 새로운 자리를 제안받는 것)를 받았기 때문이다. 인터뷰까지 마쳐 최종적으로 합격을 하고 아부다비를 떠나는 날이 마침 우리가 아부다비를 떠나는 날과 같은 날이었다. 딸들 그리고 미스 엠마는 야스몰의 라브리오시에서 아부다비의 마지막 날을 함께 했다.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녀와 나는 이메일로, 왓츠앱으로 연락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2024년 2월, 그녀가 한국에 온다는 왓츠앱을 보내왔다. 짧은 서울여행을 오는데 우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두말 않고 KTX를 예매하여 아이들과 함께 그녀를 만나러 서울로 향했다. 그녀에게 짧은 시간이나마 한국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2024년 2월 13일 금요일 아침 11시 KTX를 타고 창원중앙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오후 1시가 다되어 도착했다. 서울역에서 인사동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호텔은 예전 사라와 서울 여행을 했을 때 눈여겨 본 나인트리로 예약해 두었다. 그 곳에서 걸어서 가까운 익선동의 유명한 카페 '청수당' 에서 오후 4시에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 짐을 풀고 잠시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시계는 3시 40분을 향하고 있었다. 나와 딸들은 주섬주섬 간단한 짐만 챙겨 익선동으로 향했다. 기분이 묘했다. 아부다비의 영국 학교에서 만난 그녀를 내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사람의 인연은 참 귀하고 진하다. 그것도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는 것이 참으로 의미있고 감사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의 발걸음은 청수당 앞에 멈추었다. 청수당의 건물은 전통 한옥같아 보였는데 입구로 들어가는 작은 연못이나 대나무 때문에 일본 료칸 느낌도 났다. 내부는 모던하고 단정했고 공간이었다. 곳곳에 흐르는 물과 이끼 식물들을 전면 배치해 싱그러움을 더했다. 나는 그곳 시그니처 메뉴인 말차 프로마쥬 케이크를 골랐고 미스엠마는 딸기 프로마쥬 케이크를, 딸들은 천혜향 청수를 골랐다. 케이크는 만사천원정도로 납득이 가능한 가격이었는데, 음료는 한잔에 팔천원 가까이 하는 꽤 비싼 가격이라 놀랐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하고 생각하며 지갑을 활짝 열었다.


아부다비를 벗어나, 학교를 벗어나 만난 그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녀는 1993년생이니 나보다 9살 어리다. 내가 2024년 2월 당시 만 41세였고 그녀는 아마 만 32세이거나 만 33세였을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사회 생활도 어느정도 하고 결혼 적령기에 가까운 나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머릿 속의 그녀는 우리가 처음 만난 2019년 여름으로 기억되어 있어 앳되게만 생각했었다. 카페에서 나와 다시 명동으로 향하며 그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사람들은 옷을 잘 차려입는 것 같다는 이야기, 싱가폴의 교육열이 뜨겁다는 이야기 등을 나누는 가운데 30대 여성으로서의 평범한 고민과 생각을 그녀도 갖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발걸음을 옮기며 대화가 이어지면서도 그녀는 시종 침착했다. 찬찬하게 오랫만에 만나 어색해하는 나와 아이들이 편안해질때까지 잘 기다려주었다. 내면이 참 조화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우리는 명동의 올리브영에 함께 가서 구경을 하고 쇼핑을 했다. 길거리 음식인 탕후로도 사먹고 저녁은 인사동으로 돌아와 인사동 나인트리와 같은 건물에 있는 식당에서 비빔밥과 불고기를 대접했다. 그녀는 비빔밥을 남기지 않고 맛있어 하며 다 먹었다. 우리 음식을 이질감 없이 잘 먹는 것을 보니 신기하고 고마웠다. 밥을 먹고 1층으로 내려가 딸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가게에 들어갔다. 그녀들은 미스 엠마를 만난 것 보다 서울에서의 쇼핑에 신이 나 있어 보였다. 영락없는 10대 아이들이다. 함께 인사동 골목 골목 작은 소품들을 구경했다. 딸들은 쌈지길에서 와펜을 붙여 만든 가방을 샀다. 그녀와 나는 딸들을 기다리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갔다. 다음 날 만날 약속을 하고 그녀와 헤어져 호텔에 돌아와서는 빡빡한 일정의 피곤함에 우리 세 모녀는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녀를 한국에서 만난 것이 어안이 벙벙하고 실감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꿈의 나라 초입에 다다라 있었다.


다음 날은 국립중앙박물관 일정으로 잡았다. 그녀가 한국에 오기 전 나는 그녀에게 어떤 곳들을 같이 가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와 함께 가는 곳은 어디든 좋다는 사랑스러운 대답을 했다.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대해 이야기 해줄 것도 있고 그 안에 식당과 카페도 있어 끼니를 해결하기도 좋을 것 같았다. 또 박물관 앞 연못은 겨울이지만 운치있어 같이 걷기 좋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을 간단히 먹고 딸들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멀리서 미스 엠마가 보였다. 딸들은 익숙한 듯 뛰어가서 그녀에게 안겼다. 나도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사람을 웃게 하는 마법을 지녔다.


그날도 어김없이 딸들은 박물관 문화재들보다 기념품 가게의 예쁜 물건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관람 시작부터 쇼핑을 하고 1층부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온 친구와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했다. 어느새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우리는 1층 푸드코트에서 함께 피자를 먹었다. 그리고 소화도 시킬 겸 바깥으로 나가 커피를 사고 함께 연못 앞에 앉았다. 겨울이었지만 햇살이 따뜻해 벤치에 앉으니 어느새 몸이 노곤해졌다. 딸들은 연못가 주변에서 놀고 나는 그녀와 벤치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국어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는 이상하리만치 스스럼이 없어진다. 그건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내가 해당 언어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어서이다. 외국어로 말할 수 있는 어휘가 부족하니 사고가 단순해진다. 그래서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고민이 툭 튀어나온다. 두 번째는 외국 문화에서는 나의 문화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을 수용해줄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물론 양쪽 문화에서 다 수용이 안될 때도 있지만, 한국 문화에서 터부시 되었던 것들이 외국 문화에서는 다양성과 독창성으로 받아들여진 경험이 있기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 친구들을 한국 친구들만큼 자주 볼수 없는 상황이 역설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든다. 자주 보고 내 상황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게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나의 변화와 성장을 감지하는데에 둔하다. 일상적이라 나도 모르게 놓치고 있는 나의 생각의 변화와 성장, 나의 성향과 방향성은 가끔 보는 나의 외국인 친구들이 더 잘 본다. 그런 것들을 알아차리고 만날 때마다 애정을 담아 나에게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로또보다 큰 행운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가끔 생각한다.


미스 엠마와 나는 교사와 학부모로 만났지만 이제 같은 교사로서 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한 사람들로서 나눌 것이 많은 친구가 되었다. 2019년 여름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어있을까? 나의 딸들은 지금과 같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신기하고 신비하다. 그녀의 햇살같은 따스함으로 견뎌낸 딱딱하고 차가웠던 아부다비 살이와 영국학교의 입문이 한결 수월했다. 고마워 미스 엠마. 이제 우리가 싱가폴로 갈게요. 곧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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