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흔들리는 마흔을 견딘 시간, 아부다비

2-2 다시 만난 소중한 내 가족

2-2 2019년 여름, 한국으로의 여름 휴가. 다시 만난 소중한 내 가족


나의 가족은 조금은 시끄럽다. 아빠는 56년 원숭이띠, 엄마는 57년 닭띠, 나는 82년 개띠, 여동생은 84년 쥐띠, 남동생은 89년 뱀띠다. 모두 B형이고 목소리도 크고 흥도 많다. 가족들이 모여서 모두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100분 토론을 방불케 할만큼 열기가 후끈해진다.


아빠는 행정직 공무원으로 평생을 일하시다가 2년 전 퇴직하셨다. 아빠는 종손이지만 위로는 누나,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는 샌드위치 아들이라 여린 면이 있다. 군대에 운전병으로 입대했는데 배차가 되지 않아 한번도 운전을 해보지 못하고 제대했다고 하셨다. 아빠의 다이어리를 보면 20살의 아빠가 보인다. 군 복무기간 동안에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많이 하셨는데, 주로 꽃 그림, 새 림그, 시 짓기 등을 하셨다. 나는 슈퍼 T(Thinking 생각)로 80퍼센트 사고형이다. 하지만 나에게 조금의 F(Feeling-감정)가 있다면 그건 아빠에게서 온 것일 것이다. 아빠의 다이어리를 보며 내 안의 F가 말을 걸어왔다. 현재, 마흔을 조금 넘긴 나보다 훨씬 어린 순수했을 아빠. 아빠의 그림을 보면 그때의 아빠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다. 그 때의 아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살고 있었느냐고.


반면 우리 엄마는 화끈하기로는 세상 제일 가는 신세대 할머디다. 이제 칠순을 바라보고 계시지만 나보다 날씬하고 옷 사이즈도 기성복에서 가장 작은 것을 입으신다. 30년 동안 헬스장을 단 하루도 쉰 적 없으시고 취미와 관심사도 다양하시다. 최근에는 동화구연에 푹 빠져 계신다. 뷰티계에서는 경남 1등 할머니라 자부할만큼 최강동안이다. 엄마가 주변에서 늘 듣는 말은 '어머나 나보다 훨씬 동생인줄 알았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았어예?'라는 칭찬이다. 이런 말을 듣고 온 날은 잠들기 전까지 같은 이야기를 엄마에게서 열 번은 들어야 한다. 그래도 나도 나이를 먹어보니 자기관리를 잘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도 알게되었고, 오랜 세월 자신을 잘 관리하고 유지 보수해 온 엄마가 자랑스럽다.


엄마를 낳아주신 외할머니도 나에겐 특별하다. 쉰에 남편을 여의시고 홀로 7남매를 키우셨다. 이후 보험설계사라는 직업에 뛰어 드시고는 전국 1등 판매 실적을 여러번 올리시고 그 성과로 당시 유럽 여행도 다녀오셨다. 그런 할머니가 2024년 11월 21일 타계하셨다. 나에게 큰 영향을 주신 할머니를 잃는 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에게 할머니는 무척 특별하기 때문이다. 나의 책 사랑, 외국어 사랑 모두 할머니에게서 왔다. 할머니는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독서를 많이 하는 분이셨다. 김해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늘 작은 소파 앞에 한쪽 다리를 접고 책을 탑처럼 쌓아두고 읽고 계셨다. 책을 많이 읽으신 할머니는 허허 소탈하게 웃으시며 늘 내가 하는 어리석은 질문에 늘 현답을 내어놓으셨다. 이십여년전 스무 살의 내가 할머니께 여쭈었다. '할머니, 나 어떤 사람이랑 결혼할까?'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외국인이랑 해라. 제사도 없고. 아무나 상관없다.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할머니는 훗날 내 외국어 사랑을 예견하고 계셨던 걸까? 또 할머니는 남는 시간에는 불경을 쓰셨다. 그녀의 필체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삼촌이 병풍으로 만들 정도였다. 할머니의 한문 필체는 힘이 있으면서도 무게감이 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는 할머니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낀다.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에는 할머니가 남긴 글을 보아야지. 할머니 그 곳에서도 지금 책 읽고 있죠? 나도 여기서 할머니처럼 글을 쓰고 있어요. 나중에 우리 만나면 신나게 책 읽고 글 쓰는 이야기해요 하고 할머니께 말하고 싶다.


가족은 나를 이루고 있는 팔할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내가 물려받은 유전자와 나를 키워준 환경적 요인, 그리고 나에게 미친 정서적인 영향을 생각하면 참으로 그 영향력이 크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에게도 부모로서 내가 많은 영향을 끼치는 만큼 잘 해야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은 부모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보고 자란다고 하는 말도 있다. 하지만 소중한 가족도 때로는 그 큰 사랑이 표현의 차이로 인해 상처로 가슴에 박히고 한동안 관계가 서먹해지기도 한다. 많이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커져 세상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될 때도 있다.


1989년 5월 1일까지 난, 딸 둘 집의 첫째 딸이었다. 그런데 5월 2일 남동생이 태어나고 나는 K-장녀에 막내 남동생을 둔 누나가 되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빠의 회사 발령으로 초등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양산에서 막 창원으로 이사를 와서 적응 중이던 때였다. 어린 나는 아무 생각없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가 갓난 아기가 안방에 누워있는 것을 목격했다. 나도 참 무딘 아이였나보다. 그 때까지 엄마의 뱃속에 새 생명이 자라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후로 나의 심술이 시작되었다. 두살 터울 여동생에게 나눠받아야 했던 부모님의 관심은 이제 남동생에게 몰빵되었다. 나는 하루 아침에 눈에 나지 않으면 안중에 없는 그냥 그런 첫째 딸이 되어버렸다. 밥도 안먹고 과자 부스러기나 먹으며 연명을 하고 책읽기나 공부 따위는 쳐다도 보지 않아야지하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은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셔서 도를 넘어 엄마를 괴롭히던 나를 책망했던 말씀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 미야. 너네 엄마 좀 그만 괴롭혀라. 그 아인 너의 엄마기도 하지만 내 딸이야.' 이렇게 엄마를 마음 아프게 하던 나는 훗날 공부를 잘하게 되어 엄마를 자랑스럽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내 마음속에 커져가는 T로 인해 극 F인 엄마는 서운한게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나의 공부운도 함께 들어왔기에 나는 그 당시 눈에 뵈는게 없을 정도로 오만했다. 가족 중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고 늘 1등이었으니 언제나 큰 소리로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가족들에게 '티비 꺼. 나 공부하잖아.', '내가 책에서 읽었는데 엄마, 아빠 말은 틀렸어' 하면서 바락바락 대들었다. 내 안의 F는 기도 못펴고 엄마, 아빠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아빠는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어느날 회초리를 들게 되셨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1층에서 아빠를 지나쳤으면서도 내가 인사를 안하고 쌩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종아리를 걷고 아빠에게 회초리를 맞으며 나의 반항심은 더욱 더 커져갔고 아빠와의 관계는 극악으로 치달았다. 엄마가 안간힘을 쓰며 나와 아빠의 관계를 풀려고 했지만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관계의 개선이 있었고 그 후 차차 나아져 요즘은 엄마보다 아빠가 말하기 편하다고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엄마와도 그렇다. 나를 위해 나의 이름까지 바꾼 사람이 우리 엄마다. 나와 아빠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지고 있을 때 엄마는 어떤 수를 써서 라도 집안의 분위기를 개선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첫 이름은 '유유미'이다. 성이 유, 이름이 유미. 여동생의 이름은 '유유진'이다. 성이 유, 이름이 유진. 동생은 요즘 성을 빼고 그냥 '유진'이라는 이름을 대외적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 유미와, 유진은 썩 나쁜 이름은 아니지만 성과 결합하여 엄청난 파장을 낳았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온갖 우유는 나의 별명이었다. 바나나 우유, 초코 우유, 딸기 우유 하다 못해 썩은 우유까지.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칠 즈음인 1995년. 내이름은 김삼순이 나오기 이전, 대한민국에 엄청난 개명의 바람이 불었다. 엄마는 사방팔방 뛰어 다니며 내 이름을 바꾸려고 애쓰셨다. 어느 날 좋은 이름을 받아왔다며 집으로 귀가하는 엄마를 기다리며 나는 여러가지 이름을 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유지연, 유하나, 유서영.. 그런데 엄마가 받아온 내 이름은 '유혜경'이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엄마 친구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을 받아온거 맞아?하며 연신 엄마에게 물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게 나의 운명에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했다. 사랑할 혜 자에, 빛 광채날 경. 사랑이고 빛이고 간에 촌스러운 내 이름을 가지고 중학생이 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식날부터 나는 그 이름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엄마가 그새 법원에 개명 신청까지 완료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유혜경' 왔나? 하고 선생님이 물어보는데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그게 내 이름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그렇게 불안불안한 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로도 엄마는 공무원 월급에 우리 삼남매를 뒷바라지를 하시려고 숱한 고생을 하셨다. 우유 배달부터 계단 닦이, 반찬통 세일즈까지.. 그렇게 나를 키워 교대에 보내놓았는데 교대에 입학한 나는 반 서양물이 든 로보트가 되어 있었다.


그 로보트가 이제 외국 생활까지 하며 점점 더 정서적으로 엄마와 멀어지게 되었으니 엄마는 그간의 노력이 참으로 헛된 것이며 딸 키워놓아도 아무런 보람 없다는 말을 할 만도 하다. 나도 나대로 할 말은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남동생이 태어난 후 나는 관심을 제대로 못받다가 겨우 공부를 좀 하자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다. 그러면서 내 안의 로보트가 자라기 시작한거다. 책만 아는 로보트. 나의 감성은 안드로메다로 여행갔다가 가끔씩 엉뚱한 순간에 튀어나오곤 하는데 그 때 나를 목격하는 일이 많았던 나의 가족들은 기함을 했다. 왜 갑자기 눈물을 흘리느냐고, 왜 지금 이렇게까지 웃느냐고. 생뚱맞은 F의 등장 타이밍은 나도 잘 모른다. 로보트가 그걸 알면 로보트가 아니게. 그래도 가끔은 부모님께 받은 F가 불쑥 튀어 나와 춤을 추자고 하고 음악을 듣자고 하니 그 때는 로보트 태권브이도 잠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나의 F는 오늘도 기를 못펴고 T 아래에 깔려 있지만 나는 안다. 나의 T가 저항없이 순해지는 묘한 때에 F는 나도 여기 있다고 하고 고개를 내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의 자아정체성 형성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는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아닌 20대 대학생 시절이었다. 19살 고3 수능을 치기까지는 자아고 뭐고 간에 공부 밖에 할 수 없는, 공부 외에는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는 기계로 살았어야 했기에. 20살이 되어 경남 진주에 뚝 떨어진 나는 참으로 내 자신이 낯설었다. 무엇보다 진주에는 저지방 우유가 없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진주의 이마트에 방문한 나는 크게 실망했다. 쿠팡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나는 지방 100퍼센트의 우유를 먹으며 주중을 보내다가 주말에야 저지방 우유를 먹겠구나 싶어 참담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까짓 우유를 핑계로 그냥 내 스무살이 싫었다는 걸 대신했던 것 같다. 나는 우유에 대한 기호말고는 나에 대해 뭘 알까.. 하고 물음표가 가득 하던 내 앞에 션탤이 나타났다. 션탤은 진주 교대에서 영어회화를 담당하던 캐나다 출신 여자 강사였다. 나이는 나보다 10살이 많았고 늘 오색 실크 머리띠를 두르고, 손에는 1.5리터 생수를 들고 강의실로 들어서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녀와 나는 가까워졌다. 영어를 좋아하는 나와 외롭게 진주에 정착해서 살던 션탤은 4년간 진주에서 붙어 다녔다. 같이 밥도 먹고, 운동도 하고, 주말이면 창원이나 부산, 서울에 가서 눈을 깜빡이며 상경한 시골쥐처럼 이곳 저곳 구경을 했다. 대학교 4학년 겨울 방학때는 눈이 펑펑 내리는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 작은 마을 세인트 캐서린, 션탤의 집에도 같이 갔다. 그렇게 그녀와 붙어 다니는 사이에 나는 점점 동양인의 사고방식에서 서양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뀌어갔다. 당시 나는 스무살이었지만 자아성숙도는 열 다섯살이었다. 나의 정체성은 그때 대부분 완성되었다. 캐나다에서 고작 한달을 보냈으면서 창원 엄마집에 돌아와서는 난데없이 아침부터 연어를 구워먹었다. 집에 있는 과자는 다 버려야 한다며 평생 과자쟁이로 살던 내가 집안의 과자를 몰수해서 비닐에 꽁꽁 싸매 갖다 버렸다. 엄마는 안그래도 이상한 첫째 딸이 서양물을 먹더니 완전히 맛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방에 온종일 누워 온갖 분야의 책을 섭렵하며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말들은 더 날카로워져 엄마의 가슴팍을 찔렀고 엄마는 나를 뒷바라지 한것을 제대로 후회한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첫 발령을 진해에 받고 나서도 나의 T는 날뛰며 가라 앉지 않고 영어라면 사족을 못쓰고 덤벼들어 초등학교 영어 전담교사를 계속 하며 각국 출신의 영어권 원어민들과 교류를 이어가게 되었다. 나는 껍질만 한국 사람인 노랑머리 파란눈이었다. 그런 내가 불교를 평생 의지하고 살아온 엄마와 부딪히는 건 안봐도 비디오다. 사사건건 엄마와 부딪혔다. 내가 조금만 성숙했더라면 서양물이고 동양물이고 똥물이고 간에 엄마에게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세련되게 대했을텐데, 나는 설익은 떨감이어서 엄마 얼굴을 자주 찡그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엄마와의 사이가 맑고 흐림을 반복하며 가끔 천둥이 치고 거센 바람이 불어도 요 몇년 사이 같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아마 나의 외국살이 때문이었기도 하고, 나의 건강 때문에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또 두 세계의 강렬한 충돌이기도 하고. 딸- 날이 갈수록 세계 시민을 향해 나아가는 외국어 사랑, 가톨릭 입교, 잡학에 관심, 아랍의 느긋함이 모자이크로 내장 탑재된 인조인간 로보트 VS 엄마- 격동의 반세기 한국을 겪어 낸 거친 강인함,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을 이끌어나가야 했던 생활력으로 인한 악착같음, 토착 신앙과 불교에 심취 있는 화끈한 얼짱 할머니. 이 둘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싸움이다. 그래서 엄마랑 만나면 늘 나는 물에 동동 뜬 기름처럼 겉돌다가 또르르 분리되고 만다. 말이 좋아 분리지. 실은 가슴이 먹먹해지게 아플 때도 많다. 내 진심이 엄마에게 닿지 않아서. 또 엄마의 진심을 느끼는게 어려워서. 우리는 별에서 온 그대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있어야 서로를 그리워 하는 걸까? 그래도 또 급할 때는 엄마 밖에 없어서 나는 겸연쩍게 엄마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다. 언제 엄마에게 쌀쌀맞게 굴었냐는듯 굴복하지 않으면 내 생활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만한 에어백이 내 인생에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비굴한 변명이다. 그냥 마음 속 깊이는 엄마를 사랑한다고. 엄마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면 될텐데 아직도 나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나보다. 그녀에게 큰 사랑을 받았기에 그녀에게 기대하는 것이 큰 내 마음을 보지 못하는 미숙함에 오늘도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2018년 12월 28일에 아부다비에 도착하고 6개월이 흘렀을 때였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짧은듯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낯선 땅에서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그 시간 안에서 나는 성장했을터이지만 너무나 아프고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다 실제로 몸이 매우 아프기 시작했다. 2019년 6월이 되자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컥"

"아래"

"컥"

"웨이트로즈 마트에"

"컥"

"갈건데"

"컥"

"같이 갈래 얘들아?"

"컥컥"


한 문장을 채 끝맺기도 전에 기침이 연거푸 나와서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며칠간 고열이 나고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부다비라는 새로운 곳에 오니 새로운 전염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하나씩 방어막이 뚫린 나와 아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해진 우리의 몸은 전염병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듣도 보도 못한 병들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일찍이 사라진.. 스칼렛 피버(성홍열) 같은 것들도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괴롭혔다.


열이 나고 몸이 으슬으슬하니 안그래도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더욱 차게 느껴졌다. 곧 방학인데, 바깥 온도는 50도에 육박하는 이 곳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꼬박 에어컨 바람 아래에 두 달 동안 갇혀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숨이 턱턱 막혔다. 6개월전 아부다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듬해 바로 여름에 한국에 가는 시나리오는 예상에 없었다. 비행기 값만 해도 솔찬히 들고 두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엄마 집에 가 있으려니 그것도 눈치가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지고 싶지 못하게 될 정도로 몸도 마음도 지쳐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비행기 티켓을 샀다. 일주일 뒤인 7월 초 아부다비를 떠나, 8월 말, 학교 개학을 일주일 앞두고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마음은 영 낯설었다. 믿기지 않았다. 이대로 한국으로 영영 가버리고 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며 비행기 안의 좁은 이코노미석에서 뒤척거리는 동안 머리 위 안전밸트를 다시 매라는 표시 등에 불이 깜빡였다. 그토록 오고 싶던 대한민국. 10시간을 날아온 내 조국. 우리가 도착한 김해 공항에는 내 가족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 아빠, 여동생, 남동생 모두 내 눈앞에 나타났다.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때보다 진하고 행복한 한 달을 엄마 집 창원에서 보냈다. 가족들과 여행도 가고 먹고 싶던 한국음식도 잔뜩 먹었다. 밤새 밀린 이야기를 하고 자다 일어나면 먹고 또 먹고.. 5킬로는 족히 불었다.


돌아가는 날이 다가오는게 두려웠다. 한달이라는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무심히 흘렀다. 일주일은 하루 앞으로 또 한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산가족을 방불케 했다. . 드디어 공항에 가기 위해 엄마집 아파트 1층 주차장에서 헤어지는 순간이 도달했다. 우리는 동네가 떠나가라 꺼이꺼이 울었다. 언제 다시 한국에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하, 민하도 이 곳을 떠나기 힘들어했다. 가족을 두고 다시 낯선 곳으로 가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영상통화도 있고 메일도 있지만 이렇게 살을 부대끼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만날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답답함과 아련함을 언제까지나 안고 살아야할까 생각을 하며 아빠의 자동차는 어느새 김해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소중한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하는지. 그렇다고 다시 한국에 돌아올 용기도 없다. 내가 가자고 한거잖아, 아부다비. 그렇게 자녀들을 추스르고 아부다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귀양을 가는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낯선 곳으로 가면서 드는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 내가 그 곳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일상적으로 해 내야 하는 일들을 해 낼 재간이 있을까? 'This plane is going to land on Abu Dhabi(이 비행기는 곧 아부다비에 이륙할 예정입니다)' 하는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그런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모두 사치였다. 이제 일상을 다시 전투 자세로 맞딱뜨릴 시간이다. 안전밸트를 꼭 붙잡으로 내 마음도 이 안전밸트처럼 다시 꼭 붙들어맸다. 그래 뭐가 되든 될 것이다. 난 유득종과 이득연의 자랑스러운 딸이다. 못할 것도 없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0화2-1 러블리 살라마, 아부다비 판 아리아나 그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