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에마리티 시스터
아부다비에 온 지 3개월이 흘렀다. 아이들의 아빠는 주중에는 3시간여 떨어진 바라카 원전에서 일하고 주말마다 집에 왔다. 주중에는 아직 아부다비라는 낯선 곳에 나와 아이들 뿐이었다. 황량한 사막에 지어진 화려한 빌딩들 속에서 길 잃은 양처럼 나는 불안했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하는 질문이 하루에 몇 번씩 머리를 맴맴 돌았다.
그래도 내가 오자고 한 곳이다. 가족들을 설득하여 온 것이 바로 나니까 어깨가 무거웠다. 뭐라도 좋은 것을 찾아 아이들에게 증명해야 했다. 우리가 잘 지내던 한국을 떠난 이유를 보여 주기 위해 아부다비 이곳저곳 분주하게 다녔다. 주말이면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대형동물원, 알아인 동물원에도 갔고 아부다비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두바이에도 자주 놀러 다녔다. 온갖 연간 멤버쉽 회원권이란 회원권은 다 샀는데, 두바이 레고랜드 1년 회원권, 루브르 아부다비 박물관 1년 회원권, 두바이 엑스포 1년 회원권 등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어디를 가나 나는 이방인이었고 나의 불안함과 불편함으로 인한 긴장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해졌다. 아이들은 제 하나 지키기 힘들었을 작은 몸과 가녀린 어깨로 내 옆을 자주 조용히 천사처럼 지켜주었다. 또 그 시간들을 함께 말없이 견뎌내었다. 그때엔 그게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아이들을 향한 뒤늦은 미안함이 밀려온다. 왜 난 늘 아이들에게 미안했던 일들이 더 생생하게 기억날까?
아기. 사랑스러운 나의 아기. 내 둘째 딸 민하는 태어나고부터 아주 순한 아기였다. 갓난아기 때에도 울거나 칭얼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 생후 100일 즈음 잠에서 깬 민하가 기척도 없이 모빌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민하는 키우기 수월한 아이였다. 그런데 아부다비로 이주하자 그녀의 기질이 180도 바뀌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도 민하는 나에게는 까다로운 아이가 되었다. 그녀를 이해한다. 어린 나이에 문화적 충격을 겪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재입국으로 인한 문화충격을 다시 겪어야 했으니 말이다.
어른에게도 어려운 문화적 충격의 과정을 어린 민하가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함에 가슴이 저릿하다. 민하가 한국을 떠난 건 만 4세였다. 11월 6일이 생일이고 12월 28일에 출국했으니 4돌하고 2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민하는 영어는 커녕 한국어도 능숙하지 않을 나이였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아부다비에 가서 어린이집이나 기관에서 친구들과 놀며 영어에 노출이 되면 저절로 영어가 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순둥이 막내는 하루 아침에 까칠이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인이라고는 그녀 딱 하나였고 민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서로 대화할 때 영어 아니면 아랍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이었다. 어쩌면 아랍어로 대화하는 아이가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UAE는 다문화국가인 만큼 가정에서 부모들도 이중언어사용자가 많고 그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이중, 삼중언어사용자가 된다. 하지만 모국어는 대체로 아랍어라서 아랍어로 시작해서 기관에 가면 영어를 배우고 초등학교 이상 진학하면 제 2외국어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는 식이다. 하지만 에미라티들은 서로 함께 있을때에는 아랍어를 사용하므로 에미라티 비중인 컸던 민하의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대화할 때 아랍어를 쓰는 것을 자주 보았다.
2019년 4월 민하를 미국 학교에서 퇴교시키고 가정 보육한 지 3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그녀와는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항상 붙어 다녔다. 에미리츠 아이디와 운전면허증을 발급 절차를 밟기 위해 관공서에 갈 때도, 장을 보러 마스다르 몰이나 카르푸나 룰루 슈퍼마켓에 갈 때도, 주하를 학교에 보내고 근처 공원을 함께 산책하기도 했다. 제일 자주 간 곳은 리한 하이츠 아파트 1층의 코스타 카페와 그 옆 나란히 붙어있던 슈퍼마켓 스피니즈였다. 민하는 코스타에서 매일 아침 아이스 초콜렛을, 나는 라떼를 마셨다.
그리고 마이 퍼스트짐(My first gym)이라는 어린이 체육시설에 보냈다. 유아부터 초등 저학년까지 이용 가능한 마이퍼스트 짐은 간단한 체조부터 댄스, 수영까지 다양한 과목을 한 달 무제한 이용권을 끊어서 다닐 수 있었다. 민하보다 어린아이들도 있어서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수영 과목은 특히 그녀가 좋아했다. 민하도 조금씩 아부다비에 마음을 여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이퍼스트 짐은 기관이 아니고 내가 데리고 다니는 수업이라 단체생활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이제는 아부다비에 어느 정도 적응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 집 근처 어린이집에 구글맵에 널서리(Nursery-어린이집)라고 검색을 해 보았다. 반경 10km 안에 평가가 좋은 어린이집 10곳을 추렸다. 그리고 민하를 데리고 하나 하나 방문했다. 시설은 좋은데 선생님들이 친절하지 않은 곳, 프로그램은 좋은데 허름한 곳, 아홉 군데를 돌아다녔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간 곳이 로즈우드 널서리였다.
로즈우드 널서리는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주차하고 실내로 들어서자 대체로 하얗게 칠을 한 반듯한 공간들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2층으로 올라가 보라는 안내를 듣고 계단을 밟자 아이들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30평 아파트 전체를 툭 터놓은 듯한 넓은 교실에 아이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널서리 라임(유아 동요)을 보조교사 2명과 함께 신나게 부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밝았다. 교사들도 그러했다. 나의 긴장한 마음도 누그러지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나라 어린이집 원장 격인 매니저를 만났다. 희잡을 두른 금발의 상냥한 캐나다인이었다. 그녀는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곧장 민하가 입소할 수 있는 반의 담임을 만났다. 마술같이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낸다는 미스 앤드리아를 만나자 나의 마음은 의심에서 확신으로 그리고 등록으로 이어졌다. 미스 앤드리아는 영국인인데 두바이에서 태어나고 자라 본인은 이곳 UAE가 집처럼 느껴진다 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환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녀에게 민하를 맡기면 안심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어린이집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짙은 와인색에 나무가 그려진 원복을 들고 민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로즈우드 널서리만큼은 민하도 마음을 열고 다닐 것 같다는 기대를 하며 어쩌면 우리에게도 핑크빛 아부다비 살이가 시작되는건가 하는 희망을 살풋 가지며 잠이 들었다.
아부다비의 학교는 학생이 오전 7시 50분까지 등교하게 되어 있다. 아이들은 6시에는 일어나야 아침을 간단히 먹고 고속도로 같은 아부다비의 시내 도로를 시속 70킬로로 20분간 달려 주하를 GAA에 내려 줄 수 있었다. 나는 그 보다 일찍 5시 반에 일어나 도시락을 네 개 싸야 했다. 주하 것 두 개, 민하 것 두 개. 아부다비의 국제 학교들은 급식이 있지만 메뉴는 작은 샌드위치같은 것이라 한국 엄마들은 주로 김밥이나 유부초밥 또는 볶음밥 등을 아이들에게 도시락으로 싸 주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학교를 시작하는 만큼 2교시 수업을 마치고 먹을 간식도 따로 싸주었다. 학생들은 주로 과일이나 채소 스틱, 감자칩이나 프레첼 과자 따위를 싸 와서 허기를 달래었다. 요리에 젬병이고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도시락 네 개를 싸는 것은 무척 버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딸들을 위한 것이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모든게 절실했다.
그런데, 막상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민하는 다시 부적응을 겪었다. 주하를 학교에 내려주고 차의 방향을 돌려 민하의 어린이집인 로즈우드(Rosewood Nursery)로 가는 길은 늘 마음이 불안불안했다. 민하는 늘 배가 아프다며 칭얼댔고 어린이집 주차장에 도착해 아이를 안아서 내리려면 손에 땀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이를 떼어놓고 돌아서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이다. 한국에서 무난히 어린이집에 잘 다니는 아이를 이런 사막 한가운데 던져놓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욕심을 부리나 싶어 내 자신을 원망했다. 아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다시 차에 혼자 돌아와서는 아이가 걱정되어 안절부절이었다. 나는 차 안에서 많이도 울었다. 또 민하가 이 시간을 잘 견딜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날은 민하의 원에서 마더스 데이(Mother’s Day) 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마더스 데이(Mother’s Day)는 우리나라의 어버이날 같은 개념이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엄마와 아빠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날이 각각 정해져 있다. 민하네 널서리에서 마더스데이 약 한 달전 엄마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리고 마더스 데이 한달 쯤 전부터 민하는민하는 집에서 같은 노래를 계속 불러댔다. 'Mommy loves me, yes I know'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엄마가 세상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사랑스러운 노래다. 나는 유튜브에 해당 노래를 검색하고 민하랑 같이 부르곤 했다. 그 노래를 오늘 공연에서 보여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엄마들을 위해 마련한 좌석에 앉았다.
민하반 친구들의 순서가 왔다. 먼저 영어 노래 'Mommy loves me, yes I know'를 부르고 이어 아랍어로 된 노래를 한 곡 더 불렀다. 노래를 듣는 내 눈시울이 이내 붉어졌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민하가 이 곳 어린이집에 등원할 때마다 힘들어 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간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반 아이들과 선생님과 함께 노래를 연습해서 내 앞에서 불러주고 있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아리고 고마웠다. 어떻게 이 고마움을 그녀에게 전할 수 있을까? 앞으로 민하에게 어떻게 잘해줄까를 생각하는 동안 노래가 끝났다.
민하반의 순서가 끝나자 돌도 안된 아기반의 공연 순서가 되었다. 서지도 못하는 아기들이 부스터 의자에 한데 모여앉아 'Mother's day' 노래에 맞추어 손뼉을 쳤다. 그게 그들의 공연이었다. 귀엽고 깜찍한 아기들 중 유독 눈에 들어오던 한 아이가 있었다. 생김생김이 민하의 반 친구 누니와 많이 닮았다. 혹시 동생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검정 아바야를 두른 여성이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사진을 연신 찍어대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뗐다. 'Is she your girl?'(저 아이의 엄마세요)? 라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녀가 'Oh. Yes, she is(네 제 딸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누니와 하누다의 엄마 살라마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대화를 조금 더 나누어 보니 살라마는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에마라티 여성이었다. 생김새도 아리아나 그란데를 닮았고 성격도 톡톡 튀고 밝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말할때는 확고하고 분명했고, 아이들을 대할 때도 한없이 다정한 듯하지만 말 끝에는 독립심을 심어주는 표현을 잊지 않는 똑똑한 여자였다. 그녀는 특히 나에게 아부다비가 두 번째 고향이 되게끔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아부다비에 도착해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고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서 전혀 문외환이었을때 그녀는 나를 그녀의 친정집으로 초대했다. 그녀의 친정집은 엘레베이터까지 장착한 거대한 4층짜리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아랍 특유의 응접실이 있었다. 20명은 족히 들어갈 법한 널찍한 응접실에서는 여자들도 모두 아바야를 벗고 아랍식 실내복 옷을 입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담소를 즐겼다. 나는 라마단이 끝난 이드(Eid)에 그녀의 친정에 초대받아 제대로 아랍식의 연휴를 보낼 수 있었다.
주하와 민하는 누니와 하누디의 10명 남짓되는 사촌들과 함께 4층집 계단을 오르내리면 술래잡기도 하고 애완 동물도 구경하며 신나게 이드를 보냈다. 우리네 설이나 추석처럼 아이들이 용돈을 받기도 해서 주하, 민하는 10디르함(3500원)이나 20디르함씩 많게는 50디르함을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에게 받았다. 무엇보다도 살라마의 엄마, 아빠께서 우리를 무척이나 환대해 주셨다. 얼마나 마음이 편해졌는지 주하, 민하도 긴장이 풀어져 내 집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부다비에 온 것이 마냥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살라마는 이드 행사를 끝내고 집으로 떠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혜경, 여기가 아부다비에서 너의 집이야. 내 엄마는 이곳의 너의 엄마야. 언제든 주말이고 저녁이고 할 것없이 아이들을 이 곳에 맡겨도 돼. 여기엔 언제나 아이들로 북적이니까 걱정하지마. 남편없이 혼자 낯선 곳에서 아이 키우기 얼마나 힘들었니? 내가 잘 알아. 너 자신에게 조금의 여유를 줘. 그래도 돼.'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엉엉 울고 말았다. 그녀가 터트렸다. 내 안에 꽁꽁 싸매고 있던 애써 참아왔던 나의 힘들고 고된 시간들을 감싸고 있던 딱딱한 장벽을 예쁘고 부드러운 바늘 하나로 톡 터트렸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가두어두었던 온갖 아픔과 쓰라림이 봇물처럼 눈물로 터져나왔다. 그래서 그녀가 내게 해주었던 '너 자신에게 여유를 좀 줘. (Give yourself some room)'이란 말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큰 모토가 되어주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런 크고 따뜻한 위로를 받는 것은 오랫만이라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 앉았다. 내 뒤에 그녀가 서 있을 거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풀린 긴장감 때문이었을것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가장 큰 연중행사는 라마단과 이드이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29일 또는 30일동안 금식을 하는 것이다. 금식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계속 되고 물을 마시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금식을 깨는 저녁 식사 이프타와 금식이 오기 전 새벽 사식 수후르 때에 음식을 먹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4년 간 이슬람 문화권에서 살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면 라마단과 기도시간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나의 삶에서 나는, 그것이 종교든 습관든 어떤 것을 이토록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고 있냐고 자문해 보게 되었다. 아부다비에 살면서 정해진 시간만 되면 그 곳이 달리는 차 안이든, 남의 집에 방문한 시간이든, 놀이터든 가리지 않고 준비해 둔 작은 무릎 카페트를 꺼내어 신이 계시다고 믿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진지하게 기도하는 그들에게 자주 감동했다. 그 곳에 살면서 차 사고를 당해서 내 차를 견인하러 온 무슬림 운전수는 기도 시간이 되자 갓길에 차를 세우고 그대로 기도에 임했다. 차를 빨리 옮겨야 하는 내 속은 타들어 갔지만 기도를 하는 그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지못해 기도하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부다비에 이주해 오기 전, 내 가족들의 가장 큰 걱정은 어떻게 이슬람권에 가서 사느냐 하는 것이었다. 2018년 중동은 메르스 말고는 알려진게 별로 없던 때였다. 내 주변 사람들은 종교, 음식,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이 극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떤 곳의 땅을 밝고 그 곳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내가 4년 간 겪은 아부다비는 2018년 12월 28일 한국의 마지막 날 가졌던 나의 생각을 180도 뒤집어준 곳이기 때문이다. 아부다비는 내가 이제껏 여행해 본 미국, 캐나다, 호주, 오스트리아, 체코, 홍콩, 일본 등 어떤 나라보다도 따뜻한 곳이었다. 특히 사람들이 가진 포용과 너그러움은 그 중 단연 최고다. 물론 거기에는 문화적 배경이 존재한다. 아부다비는 자국민이 15퍼센트가 채 되지 않고 85퍼센트 정도는 외국인이므로 중동이라 할지라도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가 뒤섞인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미라티라 불리는 UAE 의 자국민들은 늘 이러한 외국인들에게 노출되어 있어 이슬람권의 보수적인 문화와 다문화의 결합으로 독특한 개성을 지니게 된다. 내가 만난 살라마도 그 중 하나였다.
그녀는 아부다비에서 태어났지만 많은 에미라티와 마찬가지로 국제학교에서 수학했다. UAE는 국제학교 비율이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높다. 그녀 역시 초등, 중등과정은 아부다비내에 있는 미국국제학교에서 마쳤고, 고등학교는 영국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다시 대학교는 아부다비에 돌아와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입학시킨 곳 또한 나를 만난 영국식 교육과정의 로즈우드 널서리였고 후에는 미국 초중등 기관인 West Yas American Academy(웨스트 야스 어메리컨 아카데미)에 보냈다. 해당 학교는 웨스트 야스라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내가 살던 제이나 아파트와도 가깝고 아부다비에서 가장 큰 몰 중의 하나인 야스몰에서도 가깝다. 아파트 단지 안에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시설과 짚라인이 갖추진 놀이터가 있어 방과후에 아이들 친구들과 오후 피크닉을 자주 하러 갔던 곳이기도 하다. 살라마는 웨스트 야스에 거주하므로 걸어서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어 그 학교를 택했다고 했다.
나는 아부다비에 적응하느라 가장 힘들었던 2019년을 살라마가 아니면 어떻게 보내었을까 생각해본다. 이 나라를 가장 먼저 온 마음을 열어 보여 주었으며 무슬림에 대한 편견을 깨어주고 그들의 세계에 내 발을 들여놓게 했고 팔을 뻗어 나를 이 나라에 감싸안아 주었다. 이 곳에서 처음으로 먹은 가장 맛있는 밥은 그녀의 집에서 먹은 것이 었고 이 곳에서 처음으로 받은 가장 후한 대접은 그녀의 가족들이 베풀어준 것이었다. 그녀 덕분에 외국인으로서는 특별하게 그녀의 사촌 결혼식에 초대받아 에미라티의 전통 결혼식은 어떻게 치루어지는지 볼수 있게 되었다. 진짜 아부다비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를 잊지 않고 언제나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가 한국에 여행이라도 온다면 극진히 대접할 것이고 언제라도 그녀는 내가 가장 환영하는 손님이 될것 이다. 고마워, 살라마. 빨리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