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녀들의 첫 국제학교 GAA

딸들을 국제학교에 입학시키는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국제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는 것은 아이들이 영어를 익숙하게 하는 좋은 기회였지만, 그 준비과정이 매우 복잡했다.


우선 한국을 떠나기 전 물망에 있던 학교의 인사담당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학교에 전화하여 즉각 답변받는데 익숙했던 나는 일일이 메일을 보내고 그에 따른 회신이 오면 진행하는 이 시스템이 불편하고 짜증이 났다.

게다가 이렇게 입학 과정을 진행해야 하는 학교는 한 군데가 아니고 적어도 다섯 군데 이상이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지난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과정을 다 거쳐도 현지에 도착하여 아이들은 다시 면접을 보고 최종적으로 입학 허가가 났다.

내 메일함에 입학허가서인 인비테이션 레터 (Invitation letter)가 도착하면 아이들의 입학이 허가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중요한 문서가 서면이나 통화로 진행되는 것에 비하면 이렇게 이메일로 모든 게 진행되고 결정되는 시스템이 나에겐 낯설고 어려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자녀들을 위한 일이고,

특히 내가 아부다비에 적극적으로 가고 싶어 했으니까 내가 총대를 메고 입학 절차를 알아보고 진행했다.

입학허가서를 받는 것에서 학교 준비는 끝이 아니다.

아이가 재학 중이던 학교에서 국제학교에서 구비 해 달라고 하는 서류를 모두 떼야 한다.

또 그것들을 영어로 공증받고 그것을 세종이 있는 교육부에 보내어 절차를 거치고 다시 회신받았다.

그것들을 잘 챙겨서 아부다비로 가져간 다음 국제학교에 제출한다.


한국에서 아이가 다니던 학교에도 유예신청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가 학교를 쉬어야 하는 정당한 사유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진이 다 빠지는 과정을 지나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아부다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2018년 12월 22일이었다.


2018년 여름 우리 가족이 아부다비로 이주하는 게 결정된 후 2018년 12월 말 실제 아부다비로 떠나는 날까지 나에게 주어진 준비 기간은 딱 6개월이었다.

아이들 영어 공부를 제대로 시킬 시간이 없었다. 아부다비 이주가 결정되기 전까지 나는 자녀들에게 영어를 일찍 학습시킬 생각이 없었다.

한국 교육과정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에 영어 과목이 편성되어 있으니 그때 즈음 영어학습을 시킬 요량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한시가 시급했다.

첫째 아이에게 겨우 파닉스를 가르쳤다.

둘째는 아직 어리니까 현지에 도착해서 아이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고려한 국제학교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학교의 분위기나 교육과정이 딱딱하지 않아 아이들에게 부담이 없을 것. 둘째, 최대한 한국인의 비율이 높아 아이들이 새로운 곳으로 온 것에 대한 이질감이 적을 것. 이 조건을 만족하는 학교는 GAA(Gems American Academy)였다.


큰딸은 운이 좋았다. 반에 한국인 여자 친구가 두 명 있었다. 적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 흑인 미국인 남자아이 개비와 오스트리아 여자아이 아나스타샤라는 아이가 큰딸과 친해졌다. 여기선 부모가 아이를 데리러 하교 후 매일 학교 교실로 갔다. 나도 첫날 아이를 찾으러 큰 아이 교실로 갔다. 큰딸은 개비, 아나스타샤와 강강 수월래를 하고 있었다. 세 아이가 부둥켜안고 교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날 주하와 함께 있어 준 친구들이 고맙고 반가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문제는 둘째였다. 둘째는 2014년 11월생이다. 만 4세 생일이 지나고 한 달 후 아부다비에 오게 되었다. 한국말로 하는 의사소통도 아직은 어눌했을 때였다. 반에는 한국 아이가 없었다. 학교에 입학 전 자녀들을 한국인 아이가 있는 반으로 편성해 달라고 학교에 요청했다. 첫째는 받아들여졌고, 둘째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둘째는 첫날부터 너무나 힘들어했다. 아침은 매일 전쟁이었다. 잔뜩 긴장해 학교 문 앞에서부터 덜덜 떠는 아이를 기어이 교실로 밀어 넣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난 나쁜 엄마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아이를 이렇게 힘들게 해야 하나 싶었다. 우는 아이를 떨궈놓고 오는 모진 엄마였다. 둘째는 하교할 때마다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지옥 불구덩이에서 도망쳐 나오는 아이였다. 아이도 나도 점점 지쳐갔다. 그녀의 극심한 괴로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 내 시나리오에는 없는 결정이었다. 입학한 지 2주가 되는 날, 교무처로 가서 아이를 퇴교시켰다. 그리고 집에서 돌보기 시작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힘들어서 몸부림치는 아이를 계속해서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당시 내 주변의 한국인 부모 중에는 일부러 자녀를 한국 아이가 적은 학교나 학급에 보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아이가 한국어를 더 적게 사용하고, 영어를 더 자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노출시켜 하루라도 빨리 영어에 익숙해지게 하겠다는 논리였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다.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던 아이를 갑자기 한국이 아닌 낯선 나라,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는 반에 던져놓고는, 제대로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아이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게 한다니. 그렇게 가혹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아이를 정글에 던져놓은 것이 잘한 것이라고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자녀들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학교에서 소변 실수를 한 아이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 엄마는 다 큰 아이가 소변 실수를 몇 달간 계속해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떤 아이들은 선택적 함구증에 걸리거나, 틱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민은 가족의 죽음과 맞먹는 정신적 충격을 안겨준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적응은 아이가 겪어야 할 성장통이라며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면 아이의 정신적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게 세상에 무엇인지 궁금했다. 한국에서 만난 부모들도 매한가지였다. 자녀들이 학업적으로 좋은 결과만 가져온다면 아이에게 어떠한 정서적 고통도 감수하게 할 각오가 다들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과도한 부모의 기대에 지쳐가지만, 부모는 욕심을 거둘 줄 모른다.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가 되었다가 아이가 학령기에 들어가면 학부모가 되고, 그 이후로는 다시 부모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학부모로 남는다는 말이 있다. 자녀가 본인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고 좋은 학업적 결과를 가져올 때만 사랑해주는 부모들은 참으로 못됐다. 아니 안 됐다. 스스로 잘못을 모르고 자녀들에게 상처 주는 그들이 안쓰럽다.


둘째를 집에서 돌보기로 한 후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이용했다. 아부다비는 인건비가 싸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2024년 기준 UAE 인구 1300만명 중 본국인의 비율은 11.5퍼센트 정도이다. 반면 외국인은 무려 88.5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들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며 UAE를 굴러가게 하는 일원으로 자기 몫을 다하고 있다. 이 중 소수가 영주권 개념의 골든 비자 등을 취득하며 UAE에 남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계약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뜨내기다. 현지 청소 어플로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부르는 데에는 보통 두 시간에 70디르함 정도를 지불한다. 한화 약 25000원 정도이다. 할인 행사를 할 때는 50디르함 정도에 이용할 수도 있다. 2만원도 안되는 금액이다. 일주일에 두 번 가사도우미를 불렀다. 한 번에 세 시간 정도 사용했다. 첫 한 시간 정도는 집 안 청소하게 하고 나머지 시간은 핑글리시(Finglish- 필리피노식 영어)로 둘째와 말이라도 좀 붙여보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가 영어를 낯설어하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그리고 둘째의 아부다비 적응을 위해 한 일은 어디를 가든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아부다비를 알아가게 되면 언제가 둘째도 이곳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겠지 하는 바람이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갈 수는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 새로운 환경에 떨구어진 아이가 이곳이 살 만한 곳이라고 느껴야 했다.


하지만 아부다비에서는 어디를 가나 EID(에미레이츠 아이디-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비슷)를 요구했다. EID가 있어야 운전면허증을 신청할 수 있었다. EID를 발급받으려면 지정된 곳에서 건강검사를 하고 한 달 넘게 기다려야 했다. 첫 달 쓴 택시비는 100만 원을 훌쩍 넘었다. 모래알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듯 돈은 줄줄 새는데 아직도 아부다비는 어떤 곳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나를 안심시킨 것은 UAE의 법이 강력해 범죄가 적고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엑스팟(expat- 외국인의 신분으로 UAE에 거주하며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중이 자국민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엑스팟들끼리는 동질감과 연대감을 형성하기 쉬웠다. 그래도 눈만 빼꼼 내놓은 닌자같은 느낌의 검은 아바야를 두른 에미라티들은

GAA 내부. 학교 안에 들어서면 로비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딱딱했다. 여전히 어렵게 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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