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이야기

변화(하)

by 지인

한동안 작은 소란을 일으키던 L은 늘 하던 데로 만만해 보이는 환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휴게실에서 조용히 TV를 보던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격분한 그에게서 오히려 L을 보호해야 할 정도였다. 입으로 연신 욕설과 죽여버리겠다는 외침을 내뱉으며 L에게 달려드는 그를 말리느라 한참을 진땀을 뺐다. L은 예상과 달리 반응이 거칠어 위협을 느꼈는지 욕설을 들으면서도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소라면 변명을 위해 한마디라도 더하려고 노력했을 그가 조용한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심한 말을 했겠거니 하고 짐작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상대를 자극하는 것에 한계가 없었다. 선이 없다는 말이었다. 상대의 정신적인 한계를 툭툭 치며 언제 이성이 끊어지는지 시험하며 노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상대를 분노하게 하는 자극적인 말을 선택하는 듯했다.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L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솔직히 저 재능 같지도 않은 재능에 다른 사람들이 휘둘려 피해를 보는 것을 두고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를 오랜 시간 봐온 경험 많은 이들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렇다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몇 개월의 L이 없는 동안의 안정이 지금을 더욱 힘들게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환자들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았다.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L의 입원 기간을 생각해 보면 지금껏 찾지 못한 해결책을 이제 와서 찾는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골머리를 썩던 중 문득 나는 L에게 칭찬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짜증과 화가 나는 일뿐이었지만 칭찬거리를 찾아보면 뭔가 다른 좋은점을 찾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요행을 바라는 것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요행이라도 바래야 할 정도로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별 다른 수도 없었고 잘 되면 좋고 아니라도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다. 억지로 칭찬할 거리를 찾아야 해서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칭찬거리가 튀어나왔다.


바퀴벌레를 때려잡는 것이었다. 나는 지네까지는 괜찮지만 바퀴벌레는 힘들었다. 특히 날아다니는 놈들은 벌레의 영역을 넘어선 괴물이었다. 혐오라는 단어가 발과 날개가 달려 돌아다니는것 같았다. 아무리 괄괄한 환자들도 이놈들을 피해 다녔다. 간혹 신문지로 내려치는 인물들도 있었으나 행동이 굼떠 놓치곤 했다. 그런 바퀴벌레를 L은 마치 모기 잡듯 잡았다. 나는 L에게 파리채를 쥐어주었다. L의 평가에 유용성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L의 기대치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바퀴벌레 뿐 아니라 여름이라 창틀사이로 들어오는 곤충들이 L의 손에 들린 파리채에 박살이 났다. 그때마다 L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칭찬을 했다. 의외로 그는 쑥스러워하면서 별일 아니라고 겸손을 떨었다. 나중에는 환자들이 벌레가 나오면 L을 찾기도 했다. 여름동안 L은 벌레를 잡아주며 스스로의 평가를 올렸다. 한동안 L의 언행으로 인해 일어나는 소란이 줄어들었다.


여름이 끝나면 벌레도 사라져 L이 다시 예전처럼 독화살 같은 말로 소란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늦가을이 지나자 L은 다시 주변을 들쑤시고 다녔다. L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주변이었다. 환자들은 예전만큼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의 신경을 긁는 듯한 말투에도 감정적인 관용 비슷한 것을 베푸는 것 같았다.


벌레를 대신 잡아주는 일이었다. 매일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간간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파리채를 휘두르는 일이었다. 여름 한철 잠깐 이었다. 그런데 그게 통한 것 같았다. 환자들은 L과 간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운동요법 시간에 함께 햇볕을 쬐며 서로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고작 서너 달 긍정적인 행동을 한 것 만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신기한 현상이었다. 이 분위기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의외로 L과 주변의 상호작용을 조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변화는 한사람 개인의 성격에서 시작될 수도 있지만, 주변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서 시작되기도 하는 것 같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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