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에서 중립(neutral) 포지션이라는 게 있다. 금리, 환율, 주가 같이 수시로 변하는 market factor의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산 구성. 요즘 같이 아파트값에서부터 미국이라는 세계질서의 구심점까지 모든 것들이 미친 듯이 변덕을 부리고, 헌법이라는 나라의 국제 조차 얼마나 허술한 것이었던가를 몰아서 경험하다 보니, 격랑 속에 알량한 나의 한줌 재산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는 생활인의 고민 앞에서, 할 수만 있다면 뉴트럴의 구성비를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개인의 뉴트럴은 커녕, 경제학자들이 쉽게 가정해 버렸던 거시적인 균형(equilibrium) 상태나 장기 균제 상태(steady state)라는 것도 고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듯 아련하다. 그나마 뉴트럴이나 이퀼리브리엄이 신기루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근래의 일이지만, 내면이나 의미의 문제에 대해 문사철이 그와 같은 사태의 귀결을 예견하고 경고해 온 지는 상대적으로 오래되었다.
자연주의를 표방한다는 에밀 졸라의 소설 <수인> 속 주요 인물들. 세브린, 그리고 그녀 주변의 남편 루브르, 기관사 자크 루보, 음험한 조종자 랑띠에 등의 남자들은 모두 열차의 레일 같은 일상의 궤도 위에 머물며, 유전된 욕망과 그것의 통제 사이의 균형을 도모하고 있는 듯 하지만, 결국은 서로의 얽힘 속에 격하게 표출된 균열에 의해 파멸적 결말을 맞이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주의 세계의 인물들 조차 유전으로 물려받았을 욕망, 욕동들의 반복적 충족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못했을 것이란 것이 들뢰즈의 생각인 것 같다. 졸라가 욕망이 억압을 만나고 나서야 균열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면, 들뢰즈의 경우 억압의 유무나 강도와 관계없이, 욕망들, 본능들 안에 균열 자체가 내포돼 있다고 보았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세브린이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롭게 다른 사람과 관계 맺고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더라도, 늘 같은 스타일의 상대를 고르고, 같은 패턴의 관계를 갖는 동일한 욕망을 균열없이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설사 그것이 처음에, 혹은 어느 시점에 그녀가 원하던 유일한 것이었더라도. 대충 수습해서 정리하면 이렇다.
'안정은 없다. 소강상태가 있을 뿐. 서로 상호작용하는 개별자, 모나드, 계열들은 소강상태에 머무는 한 기계를 구성하지만, 그 기계는 항상 균열을 내포한다. 와해된다. 하나의 위계질서를 와해시키는 가르침이나 혁명이 다른 위계질서를 만들고 그 위계질서는 잠시(역사의 경우 천년 정도) 소강상태에 있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내재된, 유전받은 균열이 표출될 계기를 만나고야 만다. '
이걸 실천적 관점에서 생각해본다.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에게, 이나마라도 평온한 루틴의 표면을 박살내는 균열의 파괴적 표출을 피하거나 늦추거나 완화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업이 요구된다. 우선은 우리의 일상의 구조 아래 혹은 그 위를 감싸고 있을지 모를 억압 요인을 발견하고 제거하고 회피하고 우회하는 것.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시시때때로 변형되는, 같은 것의 반복에 만족하지 않을 우리 자신의 마음의 요구를 듣고, 이해하는 것. 역시 말이 가장 쉽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한 이해만 해도 이럴진대, 타인까지는 요원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