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공기가 필요함

들뢰즈

by Zoroaster O

한 차례나마 절차적 검증 과정이 있기에, 텍스트를 대하는 새로운 유형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 찾았던 브런치 또한 식상하긴 마찬가지. 뉘앙스에 기댄 글들, 끄덕끄덕하는 반응. 심지어 글은 고사하고 ‘너의 글 잘 읽었다’라고 기껏 진심을 짜내서 달았던 댓글에 대한 답을 AI에다 돌려서 복붙하는 뻔함의 극강 형식 마저 장착한 녀석들이 버젓이 ‘작가’ 행세를 하는 곳임을 확인하고 나니, 질린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블로그에서는 그나마, ‘당신들의 글쓰기가 얼마나 불경한가?’라는 도발에 반응하는 깨어 있는 감각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놈의 것은 글을 스크롤이라도 해보고 누르는 건지, 대게가 무지성 ‘라이킷’. 깟 땜 라이킷.

차이의 철학이나 힘에의 의지는 내 생각에는 새로움을 향한 간구 같다. 매일 새로움이 나를 엄습하고 전염시켜 주길 바라는. 나를 파괴하지 않는 한에서. 반대의 극에서 내가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느껴지는 식상함이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를 느끼게 한다. 매일 술 처먹고 출근해서 똑같은 포즈로 처자느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채우려고 애썼던 내 분석 보고서를 펴보기조차 귀찮아보였던, 몇 년 위 선배. 공교롭게 같은 학교, 비슷한 이력이었던 그 팀장 새끼의 모습은, 몇 년 후 나의 뻔한 미래 같아 보였다. 그것은 죽음, 생명의 기운이 없는 썩은 시체 그 자체였기에, 소심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조차 신의 직장이라 불리던 그곳을 미련 없이 팽개치고 나올 수 있었다. (나의 성급한 소아적 발작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땐 그가 그렇게 이미지화되었고 내가 제일 견딜 수 없었던 건 그 상이 맞다.)

모든 사물의 상을 속도라는 관점으로 복원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씩 더 와닿기 시작한다. 국가 장치의 속도는 “중후함”이라고 표현되었다. 아무리 모든 변화를 포획하여 통일성과 총체성 속으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국가 장치라고 해도 그 또한 속도를 가진다. 아주 중후한 속도. 그것은 중력 가속도라는 힘에서 나오는 속도여서, 우리는 거기에서는 새로움의 감각을 얻을 수 없다.

그에 반해 전쟁 기계는 사유의 영역에서도 바깥, 사이의 사유에서 온다. 그리고 <천개의 고원>은 사유가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 주문한다. 진지한 사유는 중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체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신선한 물과 공기, 신선함 그 자체이다. 그것은 생명의 본질이나, 진화로부터의 당위 안에서 논하기보다는, 최근 내 생활의 감각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것이 더욱 와닿는다. <천개의 고원>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 바깥의 것을 기웃거리고, 손대려고 할 때, ‘국가의 인간’의 염려와 충고를 듣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새로움을 찾는 방법은 사이와 바깥이라 했다. 감각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남자인 것과 여자인 것 사이에 있다. 그러나 그 사이의 아름다움들 또한 감각 속에서 빠르게 휘발된다. 여장 남자와 아이 사이, 아이와 어른 사이, 인간과 동물 사이, 동물과 식물 사이로 빠르게 달아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한 실재하는 속도. 사이의 것과 기존의 것 사이에서 다시 기호에 포획되지 않는 무언가가 발견되어야 한다. 생식에 있어서도 새로움이란, 유장한 유전적 증식의 시퀀스가 아니라 드라큘라 같은 전염, 강렬함에 물드는 과정을 선호한다.

몇 년만에 모처럼 한강 야외 수영장을 다녀왔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도무지 시큰둥해졌는데, 그 자체가 꽤나 괴로웠다. 그 무거운 시큰둥함이 비워버린 텅 빈 시간을 채워줬던 <진격의 거인>을 두 번 거푸 보고, 그에 관한 글까지 써재끼고 나자 정말 더 이상 시간을 채울 ‘활동’이 없었다. 그래서 수영이라도 한 번 아파트 단지 내 센터를 벗어난 바깥의 다른 환경에서 해보자는 심산으로 그 땡볕 아래를 다시 찾았다. 책도 원래 읽는 중인 것들 말고, 근래에 손대지 않았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들고. 뜨겁고, 물은 미지근하고, 금요일 오후부터 미어터지는 사람들로 운동하기에 아주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내게 결여됐던 것을 알아차릴 좋은 시간이 되었다.

일상의 수준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혁명적인 새로움은 아닌 듯하다, 아직은. 다만, 고정된 루틴과 뻔한 밥벌이의 운명, 너무 오래된 책 읽기들로 나의 생활이 시들어 가는 것이 괴로운데, 그런 작은 변주들은 활력의 감각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준다는 점을 이따금씩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아마도 깊고 집요한 사유와 연구 끝에, 오직 ‘새로움’ 만이 미시적이고도 거시적인 차원에서 가장 생명적이고,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윤리적이라는, 혹은 다른 어떠한 이유에서 가장 최적이라는 결론에 봉사하는 철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일단 그것은 폭력적인 집착이나 정주적인 소유욕과는 오래 공존할 수 없을 것이기에 내게 그럴싸해 보인다.

그래서 오늘 내 손아귀에 잡히는 궁극의 철학적 질문은 이것이다. (너무 번잡스럽지 않으면서) 뭐 재밌는 거 없나? 기왕이면 a gift that keeps on giving 처럼 당분간이라도 지속가능한 새로움들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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