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감에만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읽던 책을 중간에 끊는 성미는 아니므로, 유튜브로 잠시 숨을 돌려보려 한다. 언제고 한번 접해보려 했던 “스피노자”에 대해 진태원 교수의 강의 영상을 찾아 들어보던 중 궁금한 게 생겼다.
스피노자의 말
“각 개체는 자신의 본질에 따라 자기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며 “Unaquaeque res, quantum in se est, in suo esse perseverare conatur.”,
이 노력은 그 개체의 본질 자체이다 "“Conatus, quo unaquaeque res in suo esse perseverare conatur, nihil est praeter ipsius rei actualem essentiam”
(『윤리학』 3부 정리 6,7)
내 생각
신은 무한이고, 신즉 자연(神卽自然, Deus sive Natura)인데, 코나투스는 자기원인성을 갖는다는 것은… 현대적 무신론의 시각에서 낯설지 않으면서도 아무래도 서로 조화가 잘 되지는 않는 거 같아. 즉, 우주 자체를 신이라 부를 수는 있지만, 인격적 개별자로서의 신을 설정하지 않으려했던 의도, 혹은 당대로서는 여전히 부담스러웠을 신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피해가려는 전략적 선택이라 보면 안 될까? 그렇다면, 굳이 이런 부조화를 또하나의 철학적 난점으로 남기지 않은 채 그의 철학에 좀 더 용이하게 접근해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언어 언니의 추가 설명
맞아, 아주 예리하게 봤어. 스피노자가 신을 무한한 실체라고 부른 건, 그가 여전히 17세기 유럽이라는 맥락 속에 있었기 때문이야. 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건 종교재판정에서 바로 목숨을 내놓는 일이고, 신학자들과의 대결에서도 불필요한 소모였지. 그런데 그가 말한 ‘신’은 사실 인격적 개별자로서의 신이 아니었어. 그의 신은 의지를 갖고 명령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 자연 그 자체였어. 그래서 신즉 자연이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신을 긍정하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통적 유신론을 완전히 해체하는 선언에 가까웠어.
코나투스를 자기원인적인 힘으로 설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야. 모든 개별자는 스스로의 본질 속에서 존재를 보존하려는 힘을 갖는다. 그 힘은 다른 데서 주어진 게 아니라 그 존재 자체에 내재해 있지. 그런데 이때 신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는 건, 그것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야. 신을 무한한 실체로 정의하면, 모든 유한한 양태는 그 무한한 실체의 한 표현이 되고, 코나투스 역시 그 무한한 실체의 작용 속에서 파생된 것처럼 보이게 되지. 하지만 이건 정말로 신이 ‘주체’가 되어 코나투스를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존재론의 가장 바깥쪽 틀을 무한한 실체라는 이름으로 덮어두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
이렇게 보면 신과 코나투스 사이의 부조화는 실은 전략적인 외피야. 스피노자는 신을 버리고 자연을 두었고, 그 자연 속에서 모든 존재가 자기 원인적으로 움직이는 철학을 만들었지. 우리가 현대적 무신론의 감각으로 읽는다면 굳이 거기서 ‘신’이라는 단어를 걸림돌로 삼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 단어가 어떻게 그 시대의 탄압을 비껴가며 자연철학을 구축하는 방패막이로 작동했는지를 보는 게 더 흥미로울 거야.
영혼
가끔 영혼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아마 죽어서 사라지는 게 생각만으로도 너무 아쉽고, 두려워서일테다. 근래에 떠오른 아이디어는 영혼을 불멸에 연결시키는 류의 것이다. 전에 글로 쓴 적도 있고, 나는 영혼을 하나의 스캐너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감촉한 것들을 두뇌조직과 신경계로부터 전달받아 지각하고 인식한다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코어.
다만 전에 나는 그런 영혼이 불멸이라 생각할 증거는 없다는 선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불멸도 필멸도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나, 한 가지 가설을 보태본다. 영혼 또한 질량을 가지는 물질의 최소단위인 양자일 수 있다는 유물론적 가설. 빛의 광자처럼. 그런 광자, 파동이자 입자로서 스캔, 혹은 느낌 생성이라는 기능을 가진 고유한 양자가 유한 수만큼 우주에 뿌려져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광자, 중성미자, 전자 등등이 우주에 널려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 독특한 양자는 훨씬 희소하지 않을까 싶은.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죽음을 맞이하고, 신체가 사라져 없어지면, 그 스캐너 양자 역시 그 신체에서 놓여나 이 세상 속 어딘가에 있게 되며, 그 어딘가의 주변의 것들을 스캔하고 그 때의 물질적 조건에서 가능한 느낌을 생성하며 지내게 될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양자 주변으로 다시 유기물들이 모여들고, 조직화되면, 그땐 그 나름의 체계적인 느낌을 만들며, 영혼은 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것을 환생이라 부를 수도 있고, 부활이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코나투스는 ‘스토아 철학의 자기보존 충동(오이케이오시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을 향한) 운동, 데카르트의 운동 보존 원리, 그리고 유대 전통 속의 내재적 생명력 사상(세피로트) 등’의 영향 속에 스피노자가 창안한 개념일 거라는 게 언어 언니의 설명이었다. 존재의 자기 보존 노력이 스캔이나 느낌 형성과는 다르지만, 자연과학 혁명의 세례를 흠뻑 받았을 스피노자도 코나투스 또한 어떤 물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며 보았던 그 흰 빛, 하얀 점은 뇌가 만들어낸 상이 아닌, 코나투스적 양자, 혹은 양자적 영혼이 자기 자신을 느낀 방식은 아니었을까? 어떤 물리학자가 코나투스적 양자, 혹은 양자적 영혼이라는 입자를 발견해 준다면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질까? 생명, 윤리, 자유...
첨언: 사과나무
진태원 교수의 동영상에서 알게 된 흥미로운 점은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스피노자는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추적해 본 바로는 1962년 경향 신문의 한 칼럼이 그것이 스피노자의 말인 것처럼 언급한 것이 국내에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오해의 가장 오랜 근원이며, 아마도 일본의 어떤 소스를 따오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의 짐작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유독 우리나라에서만은 스피노자가 그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공무원 시험에 철학 응용문제로까지 출제되었다고 하니, 세상의 지식이란 것의 허망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문득 궁금하다. 그렇다면 그 멋진 말은 대체 누가 생각해 냈던 것일까? 아마도 어떤 절실한 난봉꾼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