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호불호

by Zoroaster O

1. 영토


영토라는 건 면적으로 표현된다. 특정 좌표를 포함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0,0) 주변으로 100만큼이 내 영토였는데, 이러저러해서 (0,0)으로부터 떠나왔지만 내 영토의 면적이 110으로 늘었다면 10만큼의 기쁨을 느낄 것이다.


영토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이다. 코나투스. 그런데 영토를 보존한다는 것의 의미는 좌표를 보존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때로 정반대적 의미를 갖는다. 영토의 숫자, 즉 면적을 보존하고 넓히고 싶어하는 것은 유목민이다. 반면 국가 장치, 국가의 인간은 내가 한번 차지했던 좌표 주변으로 경계선을 긋고, 성벽을 쌓은 다음 국경을 만든다.


예를 들면 OO 아파트 수영장은 지금 나의 영토이다. 거기에 들어와서 매너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사람에게 나는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싫은 소리를 해도 된다고 여기고 있다. 매너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다. 예를 들어 입수전 전신 샤워 같은 기준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 유도리를 갖고 있지만, 어린이들이 성인 레인으로 넘어온다거나, 걷기 레인도 아닌 곳에서 태연히 걸어다니는 족속들에게는 가차 없다. 매너는 영토에서 내 실력을 행사하기 위해 편리하게 기댈 수 있는 좋은 명분일 뿐,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거기가 나의 영토라는 인식이다. 나에게 친절한 몇몇 수친님이 잠시 영법 레인에서 걷기를 하고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일침을 놓는 대신 그들의 사정을 먼저 이해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토는 한계를 가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 수영 실력이 변변치 않은 것이 되어갈 것은 정한 이치인데, 그때도 내가 이 수영장을 나의 영토 삼을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도 종종 화제가 되듯, 수영장 오래 다녔다고 떡값 걷고, 갑질하는 고인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가십을 접할 때면 오래 다닌 수영장 말고 달리 옮겨갈 영토가 없는 이들의 인생이 얼마나 딱딱하고 변변치 않은 것인가 하여 나를 일깨워 경계하는 생각마저 든다. 문신이나 신체 변형은 자기 신체가 자신만의 공고한 영토로 남을 것이라는 점에서 꽤나 안전하고 가장 소심한 선택인듯 보이나, 이 또한 나이가 들면서, 혹은 병마 등으로 인해 영토로서 별다른 효용감을 주지 못하는 시점이 오고 말 것이다.


2. 유목


유목민, 노마디즘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새로운 곳으로 영토를 옮겨갈 수 있는 역량, 힘 자체를 중시하는 태도이다. 연인이나 가족 관계를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는 사람이 그것을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할 때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어느 회사에서 부하 직원에 대한 영향력을 지켜낼 실력이 떨어지게 된다면 그곳은 더 이상 자신의 영토가 아닐 텐데도, 갑질이나 연차 따위를 내세워 그 좌표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연인 관계나 가족 내의 고정된 위치, 직업적 지위 같은 것에서 삶의 영토를 옮겨갈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자칫하면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된다.


존재에게 영토는 필요한데, 특정 좌표를 계속 영토 삼는 것이 거의 가능하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옮겨 다니는 것. 그러나, 자신을 기만함 없이 무언가가, 어딘가가 나의 영토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으려면, 상당한 실력이나 운이 따라야 한다. 넓고도 깊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만능일 것까지야 없겠지만, 이웃한 몇 가지 분야나 공간에서 충분히 자기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한 관계나, 관심, 실력을 평소에 키우고, 때가 됐다 싶으면 미련 없이 그곳으로 옮겨가 에너지를 투입할 준비를 해 두는 것이다. 지키지 않고, 새로운 곳을 차지하면서 면적을 유지하고 확장하며, 때로 축소되는 것을 견디는 것이 유목이다. 추해지지 않는 정주란 제국주의적 확장이라는 거시 세계에서든, 우리 개개인의 인생에서든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다못해 비슷한 좌표 위에서라도 표면에서 심층으로, 또는 심층에서 표면으로의 이동이 없다면, 그러한 정주는 필시 자신이나 주변을 상하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유목민적 이동은 직업 세계 같은 평면에서는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위상학적인 이동을 생각하면 조금 더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에서 영토 감각이 충족될 가망이 없다면, 이제 취미로서 수영에 좀 더 애정과 관심을 쏟아보면서 영토를 삼아보고, 수영도 다 됐다 싶으면, 자녀나 후손, 작물이나 업장을 돌보는 것으로, 혹은 사유나 글쓰기 같은 것에서. 물론 그 각각들이 아주 취향에 맞는 것이어야만 에너지를 쏟아붓고, 그곳을 나의 영토라 생각하며 흡족하게 굽어볼 수 있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3. 에티카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대한 대략의 개괄을 들어본 후 먼저 든 생각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있고, 내게 득되는 건 좋은 것, 내게 해되는 건 싫은 것이다 라는 뜻이야?’라는 의문이었다. ‘그게 뭔 윤리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산책 중에 다시 떠올려보니, 그건 윤리에 대한 어떤 절제와 겸허의 태도를 내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의 예에서 봤듯이, 나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코나투스의 역량 증대)을 좋은 것으로, 내게 불쾌한 것(코나투스의 역량 감소)을 싫은 것으로 대한다. 그런데, 거기서 매너라는 것 뒤에 숨어서, 나의 원칙이 선이고, 그것의 위배는 악이라는 식으로 그 불완전한 호불호를 어느 보편으로 팽창시킨다면, 그것은 우선 자신에 대한 기만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의 에티카란 내 위치, 내 시절에서의 좋고 싫음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섣불리 선악이라 여기지 말라 이르기 위한 사유와 논증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겸허한 윤리 위에, 노마디즘을 결합시킬 수 있다면, 우리가 살면서 피차간에 첨예하게 갈등하고 대립하는 상황들은 크게 줄어들지 않을까? 이 또한 하나가 틀어지면 모든 게 엉망으로 어그러져 버릴 것 같은 구상인 듯하지만,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설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세월의 뒤켠에 남겨진 이들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