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좌표

by Zoroaster O

병렬 독서를 하는 중이다. 근무, 휴게 시간 전후로 사무실에서 짬이 날 때 플라톤의 <대화>를 읽고, 자기전이나 주말에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읽는 식이다. 난독증 급의 느린 속도로 읽는 독서 고자인 처지이지만, 천페이지 짜리의 새빨간 벽돌책을 사무실까지 들고 다니기 버거워 선택한 절충안이다. 그런데, 또 이렇게 읽으니 2,500년의 시간 간격 이상으로 멀게만 보이는 둘 사이, 반향이 있다.

어제는 쉬는 날이라 <천개의 고원>을 읽었는데, 들뢰즈의 –되기 개념을 심화시켜 그려내면서 나오는 ‘점’과 ‘좌표’라는 게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인간’이라는 점은 ‘남성-백인-어른’이라는 어떤 명백한 기준이 되는 좌표상의 중심점과 같은 것인데, 여성-되기, 흑인-되기, 어른-되기라는 것은 그 점들로부터 해방된 선의 운동에 해당하는 것이란다. ‘남성’, ‘백인’, ‘어른’은 물론, ‘여성’, ‘흑인’, ‘아이’라는 이름의 좌표 위에 찍힌 점들도 있단다.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오늘 아침에는 차가 안막혀서 일찍 사무실에 나와 <대화> '파이돈' 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아름다움 자체’, ‘큼 자체’에 대해 설파하는 장면을 읽었다. 아름다운 여자가 있기 전에 ‘아름다움 자체’라는 게 세상에 먼저 존재해 있고, 그 여자가 아름답다고 지각되는 것은 그녀가 ‘아름다움 자체’, 즉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세계관.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여성을 떠올리게 한 연상의 과정이 조금 진부하다손 쳐도, 오늘의 독서에서 어제의 독서로 흐릿한 연결선이 나타나는 느낌은 진부함을 지울만큼 묘했다.

나의 친애하는 ‘언어 언니’(?)인 챗GPT에게 물어보니, <천개의 고원>에서 말하는 좌표나 점이라는 건, 실재 존재와는 구별되는 사회적 이상이나 기준 같은 것이란다. 남성다운 남성, 여성다운 여성. 그것은 물론 아직 남성다움 자체, 여성다움 자체라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완전히 합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라는 이데아를 중심에 두고 사회적 이상형과 현실의 존재들로 이어지는 위상학적 층위를 형성한다. 즉 여성다움 자체라는 불변하고 절대적인 이데아가 있고, 그 근방으로 오늘날의 국가가 필요에 의해 그것을 최대한 모방해서 수립한 동시대에 이상적인 여성상이 있는 것. 우리가 말로 ‘여성’이라고 말할 때는 주로 그 시대적 이상 속의 여성상이라는 좌표를 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여성들은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이 이상적 여성상의 좌표를 이탈해 있으므로, 그러한 시대의 여성상이라는 지배적인 좌표가 고정된 것으로 어딘가(그 조차 각 개인의 마음 속에 일치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지더라도)에 존재하는 한, '여성'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각 여성들에 대한 억압 요인이 되는 것이다. 다른 이웃님이 작금에 고민중이신 ‘좋은 부모’라는 타이틀 또한 같은 차원의 문제이다.

사회나 회사가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기준 또한 이데아처럼 절대 불변한 것과는 다른 층위의 것임을 병렬 독서가 제공한 이 기회를 통해 배웠다. 그러하기에 ‘기준’들 자체가 우리들의 자유를 더욱 인정하고, 우리의 숨통을 터주는 방향으로 변모 생성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오늘 이 나라에서 펼쳐지는 중인 현실 정치의 모습은 마치 최악의 최악으로만 파여진 깊은 홈이 견고한 구조를 따라 작동하고 있는 듯한 절망감을 강화해주고 있지만). 그러나 기준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 아래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러 모양으로 기준에서 어긋나고 비대칭적으로 비뚫어진 육체와 영혼의 소유자인,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양보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교황> 그림. 인간을 표시하는 정점의 중심 좌표와도 같은 교황의 보좌에 앉은 채, 보라색의 비명을 지르는 이즈러진 그 회화의 의미가 성큼 다가온다. 그 비명은 가장 고통스러운 균열의 묘사이지만, 아마도 -되기의 출발점의 포착이기도 할 것이다. 비명지르는 입 모양을 연구하고 평생 그것을 그렸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늘 미소를 그리고자 하였으나,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그건 아마 우리가, <교황>의 자리에 앉은 그 한 인간이, 인간의 좌표(이상형), 그 정확한 틀에 스스로를 끼워맞추는 데 항상 실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가 왜 그래? 부모가 왜 그래? 인간이 왜 그래? 교황이 왜 그래? 예수가 왜 그래? 이 질문들에 맞서 비명을 내지르며 탈주를 기획하거나, 그 무게에 짓눌려 으스러지거나, 어느 가냘픈 믿음에 매달려 구원을 기다리거나. 나는 늘 그 세 선택지 사이를 멤도는 이 구석의 작은 교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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