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벽
그 너머에는 내가 꿈꾸던 자유가 아닌
분주하게 살아가는 타인들이 있었다.
에렌은 자신들을 지키려는 마음 이전에
내 자유의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던 그들을 모조리 없애고 싶어했다.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밑도끝도 없는 이 증오는
한 맺힌 시조 유미르가 이천년간 물과 모래로 제조해 온
더 깊고 오래되고 거대한 증오와 접속하여
그 거대한 증오가 가진
파괴의 힘을 스스로 봉인하겠다는
부전의 맹세를 깨는 열쇠가 된다.
능동적이고 유능한 증오들이 마침내
세계를 짓밟는 세계 혐오를 이룬다.
세상이 내 뜻대로 배치되거나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나는, 우리는 기존에 견고하게 놓여있는
대결적 구도의 한편에 서서
다른 한편을 증오하는 것에
자신의 정체성을 걸기도 한다.
본연의 나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지난한 철학적 여정 속에서도 결코
답을 찾기 힘든 것이지만,
벽 밖의 존재를 증오하는 것으로써
혹은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어떤 것을 통해 나를 규정하는 것은
영혼의 노고라는 면에서는 쉬운 편이다.
그래서 무지성 거인, 주입된 증오에 기대어
만들어진 존재들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향해 무작정 달려들고, 물어뜯는다.
그리고 짐승 거인의 명령 한마디에 난폭해졌다 무력해졌다를 반복한다.
증오의 프레임으로 구성된 세계는 그렇다.
이 틀 안에서라면 사랑 또한
또다른 증오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된다.
작고 소중하고, 내게 아름다운 것 몇 개를
지키고자 할 때
증오는 초대형화되고,
가장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빠르고, 단단하고,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프리츠 왕에 대한 시조 유미르의
헌신도 그런 사랑이었다.
사랑은 많지만
거시적 현실 세계는 대체로
증오의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하다.
대결과 대립, 전쟁은 불가피하다.
어쩌면 에렌의 생각처럼 어느 한쪽을 지구상에서 절멸시키지 않는다면
잠시라도 그것을 멈추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냉철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평화적인 판단일지도 모른다.
남는 것은 최후의 한 가족 혹은 적어도
핍박받은 하나의 민족이어야 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 어느 누구도 절멸되는 편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
증오의 프레임을 깨는 사랑도 가능한 것일까?
태어나기 전부터도 혈통의 운명으로,
태어난 후에도 손 내밂의 인연으로 맺어진
나 자신보다 소중한 에렌,
그의 목을 소리도 핏방울도 묻지 않을 만큼
일도에 깔끔히 베어내면 가능한 것인가.
어차피
문제가 되는 프레임은 개개인의 것인 바,
각자가 스스로의 목을,
혹은 사랑하는 이의 자유에 자신의 목을
내맡기는 예수적 희생,
그건 그려볼 수 있을 뿐 가능한 게 아니지 않은가?
다시
익숙한 회의와 부조리로 돌아오는 요즘이다.
똑똑하다고 좋은 대학을 가는 것 아니고,
열심히 한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앞뒤 모순이 없다해서 말과 생각이 증식되는 것도 아니고,
되도록 많은 남을 돌아볼 줄 안다해서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미덕들도 반짝이는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 같은 것일 뿐일까.
"알아먹지도 못하겠는 그 잘난
너희들의 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아름다움?
그래서 쾌락?
그래서 소멸?
그래서 긴 침묵?
일상 너머에, 가족 너머에 무언가를 그리며,
기다리며, 꿈꾸는 것은
성실하지 못했던 내게 허락된 것은 아님을
깨닫기에는 살 날이
너무 많이 남은 것일까
이럴수록
무언가에 잔뜩 취한 아이,
밤늦도록 묵묵히 공부하고 돌아온 아이,
하루를 비운 아내의 자리.
그 모두 나를 속으로 눈물짓게 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