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TV 김양현 교수 강의를 듣는 중
필연과 자유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없는 한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우주를 아우르는 모든 존재들의 ‘필연적인’ 본성이다. 스피노자는 그런 외부의 개입, 영향으로부터 자기 보존의 노력이 침해받지 않는 상태를 자유라고 규정하는 듯 하다.
그리고 정동, 감정, 아펙투스는 외부의 어떤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남기는 것이다. 영향과 감정이 어떤 관련이 있나 의아했는데, 스피노자의 맥락에서 affect, affection 이라는 영어단어가 여러 의미를 갖게 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아무튼 만일 우리가 감정에 휘둘려 행동한다면 그것은 외부에 의해 우리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이 된다. 고로 외부의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잘 보존하는 방향으로 힘을 쓰는 “필연”을 따르는 것이 이 맥락에서의 “자유”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나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적 운명론에서는 필연이 자유의 존재 기반을 박탈했고, 에피쿠로스 학파도 자유의지의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원자론에 clinamen이라는 돌연변이를 도입하는 수정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는 필연 안에서의 자유이다. 필연을 쫓는 것 자체가 자유이고, 그 추구가 방해받는 것이 간섭이자 예속이 된다. 필연과 자유가 처음으로 같은 편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필연이라는 질서가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들의 존재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가능해진 듯 하다.
내재성과 초월성
스피노자에 따르면 결과를 자신 안에 산출하는 것이 내재성이고, 자신 밖에 산출하는 것은 외재성, 또는 그 궁극에서 초월성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빛이 있으라!’라는 명령으로 타자, 자기 밖의 세계에 빛이 생겨난 것은 외재성이고, 그 빛이 자기 안에 보태지면 내재성인 것이다.
성경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 창세기를 처음부터 읽어가다 보면 맨 먼저 갸우뚱하게 되는 대목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카인이 아내를 얻어 동침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동생을 죽이고 최초 인류의 유일한 자손으로 남게 된 그가 아내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성경 해석에서 많은 의문과 논란을 낳는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신의 초월성을 전제로 하는 데서 오는 모순이 아닐까 싶다. 그 외에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족은 또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악마 또한 신의 피조물인지 하는 류의 것들도 마찬가지 맥락의 문제들이다.
‘절대적 무한 실체’로 신을 정의하고 그에 대한 사유를 가장 철저하고 순도 높게 밀어붙인 스피노자는 내 기준에서는 가장 신실한 유신론자이다. 그리고 그의 신실함은 결국 초월적 인격체로 신을 묘사하는 것이 위의 신학적 내용들을 위시하여 여러 철학적 모순을 낳는다는 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실체들의 본질은 자신을 보존하고자 힘을 쓴다(코나투스)는 데 있고, 그들의 필연도 거기에 있다. 반면 무한 실체인 신이 존재하는 것은 코나투스의 매개 없이도 그 자체로 필연이라는 차이점이 있는 듯하다. 내재성이라는 것은 궁극에서는 모든 삼라만상과 물질, 비물질을 포섭하므로, 신이라는 기표에 어울리는 실체(기의)는 우주, 자연 그 전체가 되는 것이다.
윤리학
‘자유와 필연, 내재성과 외재성이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스피노자는 거기까지 미리 내다보았다.
모든 존재자는 무한 속성을 가진 신의 한 양태로서 신 안에 내재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존재자들은 자신을 보존하고자 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고, 그런 코나투스를 잃어버리면 다시 신 안으로 편입되어 흩어진다.
즉 우리가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필연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 필연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외부로부터 온 감정이나 정념에 휘둘리지 않고, 내 안에 지닌 실체적인 속성, 대표적으로 신체로 표현되는 ‘연장 속성’과 정신으로 나타나는 ‘사유 속성’의 역량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이성을 발휘해서 이 물질이자 사유로서 존재하는 이 우주, 신즉 자연을 다 정확히 알게 될수록 우리는 필연 속의 자유를 향해 전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인 신에 합일하는 길이기도 하며,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학적 질문에 대한 가장 현대적이고도 정합성 높은 대답이기도 하다.
종교적 파문의 저주와 렌즈 분진으로 인한 현실적 곤궁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철학을 살아냈던 그의 집요한 지행합일의 삶이 주는 울림은 우주적 심오함에 기대고 있어 더욱 깊고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