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정신으로 살려 한 잘못

by Zoroaster O

확고부동의 진리가 없다는 철학을 그렇게 읽으면서도, 아니 그 이전부터 스스로 유연함이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하면서도, 대체 왜 마치 불변의 진리가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신중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진리를 위반할까 조마조마해 하면서 소심하게 살아왔는가?

철학 학습의 종착지(구간 안에서의 무한한 라는 왕복달리기를 각오한 채)라 여겨온 들뢰즈가 말하는 것은 결국 해체 아닌가. 동일성을 읊어대는 모든 사상과 학문들을 갈기갈기 찢어가며, 그가 말하는 것은 결국 차이와 변화, 만물유전이라는 간단한 사자성어, 그리고 그것을 일으키는 힘만이 우주적인 진리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런 생각에 진작에 동의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는가? 그의 철학을 접하기 전부터도 이미 예감하고 있지 않았나. 사물들이며 존재들의 상태, 관계들, 작용들, 모든 관념들과 고랑들의 무용함.

그런데 왜! 무엇을 바라서, 이건 비이성적 과열, 저건 지속가능성 없음, 또 그건 정상적 상관관계로부터의 이탈이라 폄하하며, 편승하기보다는 도피하는 쪽을 택하며 살아 왔나? 무얼 이해할 수 있어서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을 배제하며 순수함을 위장하고 있었나.

내 삶을 수시로 빨아들이는 그 구멍난 시점, 기독교를 버리기로 한 그때로 다시 한번 돌아가 보자. 성경은 진리가 아니다. 기만이다. 그래서 나는 기만을 버리는 데 일말의 미련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에의 포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진리의 간절한 추구였는지도 모른다. 20년의 나의 세계가 그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 포기는 절박한 추구였다. <하나님을 추구함>이라는 책을 진심으로 읽었기에 진리의 일자를 만나고자 했던 스물의 나는 하나님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내게 진리란, 어떤 고귀한 높이에 머무르는 존재, 어떤 고정태, 어떤 위도와 경도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고정된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표상하는 모든 것, 모든 현상은 그런 면에서 모종의 기만들이다. 그런 면에서 다시, 기독교는, 예수는 세속이 주는 면죄를 받을 수 있다. 자본을 비롯한 거대한 어떤 음모적 준동들도 그렇다. 그것들에서 뻗어져 나온 이해 못할 현상들도 그렇다. 그저 세상이 그런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가능한 한 지복으로 한 평생을 채우고자 하는 인간은 변화의 기운을 잘 읽고, 그 위를 타고 가야한다. 그것이 니체가, 들뢰즈가 선포하고 있는 바가 아닌가? 즉 모든 변화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모든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모든 파도 위에 올라타라는 것 아닌가? 그것이 진리인 우주의 힘을 섬기고, 거기에 순응하는 스피노자적인 행복과 무엇이 다른가.

진리에 대한, 아니, 잘못된 진리의 상에 대한 그릇된 집착은 그러나 댓가가 없지 않았다. 그런 흐름을 감지하는 내 오감 육감은 그런 댓가를 치르느라 몹시도 무뎌졌다. 그런 변화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람들은 이제 내 곁에 오지 않는다. 이제 세상에 대한 내 이해와,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 자체인 세상을 감각하는 내 감각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아들들에게는 말해주고 싶다. 세상과 함께 춤추는 방법을 배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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