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퍼센트의 마음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by Zoroaster O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식의 자유? 헤르만 헤세 식으로 온전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스피노자 식으로 지복? 이 작품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것을 “백퍼센트의 마음을 회복하기”라고 부르기로 한 듯 보인다. 그리고 그 방법은 주인공인 ‘나’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라는 두 인물의 교감과 선택의 과정 가운데 두 가지로 제시된 것 같다.

이제 막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라는 대작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참이라서인지, 원래 하루키 작가의 세계관에 들뢰즈의 사상이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두 인물의 여정을 내 나름-들뢰즈적 관점에서 읽게 되었다.

가장 충만하고, 아무런 이질감 없는, 나 자신이기도 하면서, 나 자신이 아니어도 아무 상관없는 그런 ‘백퍼센트의 마음’은 작품속 주인공의 경우 한 살 아래의 16세 소녀와의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돌연히 그녀가 사라져 버린 후 주인공은 그 마음을 회복할 수 없어 공허하고 결핍된 채로 겉돌며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마흔 중반 나이에 직장을 관두고, 어느 날 꾼 이상한 꿈이 이끄는 대로,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어느 시골 마을로 떠나게 된다.

거기서 만나게 되는 옐로 서브마린 자폐 소년은 주인공의 마음속에 간직되었던 도시의 지도를 그려주고,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벽’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영혼이 앓는 역병을 차단하기 위해 세워진 벽”(529). 영혼이 앓는 역병이란 음악, 고양이나 개, 책 등 도시에 부재한 것들로부터 옮겨진다고 봐야 한다. 벽은 이러한 것들의 출입을 철저히 차단해서, 영혼이 외부의 것에 감염되는 것을 막는다.

나름의-들뢰즈를 접속시켜 본다. 벽 안의 도시는 ‘영토’이다. 자기 보존과 자기 보호의 코나투스를 가진 모든 개체들은 백퍼센트의 영토를 간직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띤다. 하지만 영토가 영혼이 앓는 역병들에 의해, 즉 음악이나, 고양이, 개, 책과 같은 것들이 그려내는 도주선에 의해 전염되고, 구멍나고, 흔들린다면, 어떻게 되나? 도시라는 영토의 코나투스는 그런 도주선이 만들어 낸 새로운 영역에 문지기나, 구덩이, 종소리 같은 포획 장치를 보내, 그 새로운 영역을 제 안으로 편입시키고, 그 중심성을 흩트리지 않아야 한다. 때가 되면 종소리를 듣고 벽 안으로 돌아와 잠드는 단각수들은 아마도 이런 뜻의 재영토화된 분자들일 것이다. 또는,

영토의 견고함을 버리고, 벽 속을 헤엄쳐, 벽 안쪽의 도시와 벽 바깥쪽의 이 세계 사이를 끝없이 넘나드는 존재로 남는 것 또한 운동성, 비고정성이라는 자신의 백퍼센트로 다가가는 법이 될 수 있다.

하루키의 시선이 흥미로운 점은 소년이 의미하는 내적으로 완결된 폐쇄성과 주인공이 경험하는 진동하는 무형적 개방성을 대립적 관계에 두어 어느 한쪽을 긍정하고, 다른 쪽은 부정하는 이분법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둘 다 자유이고, 둘 다 각각의 참된 자기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옐로 서브마린이라는 폐쇄적이고 내적 완결성을 갖는 공간은 소년이 '옐로 서브마린' 잠퍼 다음으로 즐겨 입는 점퍼에 그려진 ‘제러미 힐러리 붑’이라는 인물의 특성에 의해 내면의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흐름을 확보한다.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식물학자, 고전학자, 치과의사, 풍자작가… 뭐든지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아닌 남자” 즉 nowhere man이다. no + where = now + here의 존재. 즉 들뢰즈의 ‘아무것도 아닌 사람 되기’의 이미지를 품은 존재이다. 장르와 분야를 불문하는 소년의 독서는 마치 고른 판 위의 운동, 개미떼, 유목적 운동의 이미지를 묘사한 듯하다. 또한 그는 주인공이 묘사한 도시를 그대로 재현하는 사본이 아닌 도시의 “지도”를 제작해 낸 사람이기도 하다. 이렇듯 소년은 그 내면에서 완전한 고른 판으로서 홈 없는 매끈한 공간을 구현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오래된 꿈을 잘 읽어낼 수 있고, 그 일을 사랑하는 자신으로 살며, 머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자신의 숙명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벽 안의 도시는 마침내 그 자신만의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노란 잠수함이고, 그 안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두이기도 한 ‘제러미 힐러리 붑’처럼 존재하며 살아 갈 수 있다.

그런 숙명을 발견하지 못한 주인공의 사정은 좀 다르다. 그는 그림자를 버리고, 눈에 상처를 낸 후에야 꿈에도 그리던 소녀가 있는 벽 안의 도시에 간신히 다다를 수 있었다. 허나, 그녀와 이야기하고, 그녀 옆에서 일하고, 그녀를 바래다 주는 반복되는 일상은 안온하고 포근하지만, 그를 사로잡았던 백퍼센트의 마음이라 하기엔, 어딘가 뜨뜻미지근하며, 그가 소녀의 도움을 받아 수행하는 오래된 꿈 읽기란 것도 그 의미나 재미를 선뜻 느끼기 어려운 면이 있다. 아무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흔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 도시로 들어온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는 달리, 그는 벽 안에서 내내 확신을 갖지 못한다. 내가 과연 이 안에 머물고 싶은가? 그림자를 버려도 좋은가? 그림자를 죽게 내버려둬도 좋은가?

그래서 그는 도시와 이 세계를 몇 차례 오간다. 옛 기억에 사로잡힌 도시 안에서의 루틴은 차이가 없는 반복일 뿐이지만, 이 세계의 일상 안에서는 나름의 리듬으로 반복되는 루틴들도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매주 월요일 고야스 씨의 무덤에 들렀다, 카페를 방문하는 반복에서 카페 여주인의 표정이나 행동의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고, 반응한다. 운명 같은 강한 끌림은 없었을 지언정, 방문이 거듭되며 그녀가 가진 매력과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며 점차 그녀에게 끌린다. 반복 속에 쌓인 작은 차이들이 만들어낸 그런 끌림은 마침내, 오랜 세월 속에 백퍼센트의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던 소녀의 옛모습이 있는 벽안 도시를 떠나, 주인공이 이 세계로 돌아오기를 진정으로 원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매일 같이 도서관에 들러 같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정해진 시각에 귀가하는 소년과의 관계도 주인공에게 반복 속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는 늘 같은 요일에 고야스 씨의 무덤을 찾아 자신이 오래 품고 있는 도시에 대해 독백의 말을 뱉지만, 그 반복의 독백은 거기에 숨어 있던 소년에게 전해짐으로써, 소년의 운명을 일깨우게 된다. 또한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그 둘은 도시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게 되고, 도시에서 조우하여 하나의 몸체 안에 동거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동거는 주인공이 진심으로 속하기를 ‘원하는’ 세계가 어디인지를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된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도시와 이 세계의 ‘불확실한’ 경계를 넘나드는 탈영토화의 운동 자체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각자의 처지에서 자유와 백퍼센트의 의미가 달랐듯, 벽이나, 오래된 꿈의 의미도 다르다고 생각된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란 변화 없이 안정된 자폐적 정신, 세계, 사회, 장치, 국가. 차이 없는 반복만이 이어져 시간의 의미가 없어져 버린 공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반면, 소년의 입장에서 그곳은 노란 잠수함처럼 궁극의 내적 공간이 된다. 오래된 꿈이라는 것은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일원론의 형이상학 같은 납득하기 어렵고, 도달할 수도 없는 허망한 이상일 수 있지만, 소년에게는 자신의 내적 세계에 끊임없이 공급되는 생성의 에너지 자체일 수 있으리라.

공통되는 부분도 있다. 혼령으로 나타나는 고야스씨의 특이한 옷차림은 여자-되기나 기관없는 신체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내적으로 완결된 세계에 머물러야 하는 소년에게도, 두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탈영토화의 운동으로 존재하는 주인공에게도 이러한 –되기나, 기관없는 신체는 자기 존재의 충만함에 대한 지향점이 된다. 고야스씨와 주인공, 그리고 고야스씨와 소년은 지상과 지하의 경계 공간, ‘사이’의 공간이자, 들뢰즈에 따를 경우 생성의 공간일 수 밖에 없는 반지하 방에서 각각의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다에게 사이에 있는 생성의 장소는 필요한 것이므로.

소년은 주인공에게 말한다.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벽 바깥의 공간으로 갈 수 있다. 소년이 이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벽 안의 세계로 옮겨 갈 수 있게 된 것도 같은 방법이었으리라. 그래서 결국 남는 질문은 최진석 교수나 데미안의 질문과도 같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가까스로 <천 개의 고원>을 완독하고, 휴식 삼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게 됨에, 그 둘은 내 안에서 서로 얽히면서 어떤 의미를 자아냈다. 당분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작품을 읽을 때, 내 안에서는 아마도 다시금 들뢰즈의 세계와의 연결 접속이 시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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