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들뢰즈, 스피노자, Juvenal
그림자는 대지에 깃든다. 즉 내가 태양 아래서 대지를 딛고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벽 안의 도시로 들어가려면 그림자를 버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란 어떤 관념의 세계일 것이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책 속의 온갖 기호와 관념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관념들을 초인적인 속도로 흡수하고 그 안에서 온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대지의 사람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고, 그 자신 또한 대지의 그들에게 자기를 전할 수 없으므로, 그에게 대지는 도리어 감옥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 개체가 그러할 것으로 생각되듯, 순수한 관념 세계 안에서만 살 수 없는 사람일수록, 그림자가 옅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하루키의 생각인 듯하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고양이 ‘오쓰카’는 고양이와 소통하는 능력을 가진 노인 나카타에게 “누구 집 말뼈다귀인지 모를 새끼 고양이를 찾아주러 다니는 대신”, 자기 그림자가 옅어진 것을 좀 더 신경쓰는 게 좋겠다고 일러준다. 그림자가 옅어진다는 것은 현실 감각의 약화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삶의 육체성, 혹은 물질성에 대한 감각 따위의 표현을 대신 사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무한 역량으로부터 파생된 자기 보존의 관성 원칙인 코나투스가 정신에만 관련되는 것은 의지이고, 정신과 육체에 동시에 관련되는 것은 욕망이라고 했다(의지란 불구 상태의 욕망일 뿐인 건가?). 그리고 인간의 본질은 의지가 아닌 욕망이라 보았다. 또한 욕망은 인간의 의식이 결합된 욕구에 다름 아니다. 그에 따르면 어떤 대상에 좋음이 먼저 깃들어 있어서 인간이 무언가를 욕망하고, 추구하고자 노력하는 게 아니라, 자기 보존을 위하여 욕망하게 되는 것에 대해 좋은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욕망이 다양하다는 것, 바꿔 말해 다양한 욕망에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외부의 자극이나, 외부적인 것과의 접속이 자신의 신체(예, 이미지)와 정신(예, 상상)에 일으키는 변용들이 있고, 그러한 변용들이 input으로서 어떤 욕망을 output으로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다이나믹한 함수 관계 자체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아이디어를 받아 인간을 포함한 그러한 변용-욕구의 함수관계로 작동하는 존재들을 기계라고 했고, 하루키 또한 <해변의 카프카>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프란츠 카프카의 매력이 그런 기계로서의 인간을 정확히 묘사한 것에 있다고 언급한다.
그림자나 욕망이 말하는 것은 어둡고 내밀한 무언가가 아니라, 오히려 밸런스인 것 같다. 얼른 떠오르는 격언, Mens sana in corpore sano! 로마의 시인 Juvenal의 풍자시집에 수록된 이 유명한 문구는 원래 의도에서는 되려 아름다운 신체에 걸맞는 건전한 정신을 깃들이지 못하고 있는 당시 세태를 풍자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시대는 부, 외모, 권력, 장수 같은 것들이, 육체의 것들이, 대지의 것들이, 그림자들의 보증을 받는 것들이 욕망을 지배하는 시대였던 모양이다. 중세와 근대의 유럽은 그 반작용 격으로 욕망 안의 육체와 대지의 요소가 천시되고 억압받는 시대였던 것인가? 니체와 들뢰즈는 각기 그들의 시대도 여전히 대지의 것들의 밀도를 좀더 회복해야 한다는 쪽이었을까? 균형의 거울 앞에 지금 시대와 지금의 나를 비춘다면 어느 모양으로 이지러진 모습을 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