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전의 어느 여행담
손담비를 아시나요?
세대에 따라 2008년에 소위 의자춤으로 유명했던 "미쳤어"라는 곡의 가수로 기억하시는 분과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배우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나눠질 듯도 한데요. 가수로서 화려했던 전성기를 기억하는 저에게 화려한 외모와 현란한 댄스로 유명했던 그녀는 소위 한 세대를 씹어먹은 여신급 아이콘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미쳤어"와 "토요일 밤에"라는 메가 히트곡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던 그녀의 프로필을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전후로도 활동을 쉰 것은 아니지만, 전성기의 임팩트가 워낙 강했던 터라, 이후의 활동은 침체기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2018년 무렵 'SNL 코리아'(전신 녹색 슈렉 분장을 하고 나왔음)와 '나혼자 산다' 등 예능을 섭렵하더니, 연기자로서 가수시절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는데, 그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네요.
최근에는 스케이팅 국대 선수와 결혼했고, 어떤 정관계 스캔들에 이름이 오르내리긴 했어도, 손담비는 제게 한동안 "우리 담비"였습니다.
인생 최고의 여행, 이탈리아 중남부
미국에 잠시 살던 시절 기동력이 한참 좋던 저희 가족은 부족한 연차를 쪼개어 붙여서 부지런히도 여행을 다녔습니다. 직접 운전을 해서 다녀보는 자연의 절경과 다양한 랜드마크들 속에서 쌓은 추억은 저희 가족의 팀워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준 소중한 자산이 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인생 최고의 여행으로 저는 주저없이 7년전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꼽습니다. 미국에겐 미안하지만요.
사실 이탈리아 여행이 처음부터 막 즐겁거나 기대에 차 있진 않았어요. 제가 낯선 환경에서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 데다가, 미국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한번도 운전을 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아내가 처음 이탈리아 여행을 제안했을 때부터 어쩐지 조금은 시큰둥했어요. '그 복잡한 로마에서 운전하려면 피곤하겠네'라는 생각부터 들었지요.
어쨌든 아내는 운전만 해달라고 제게 부탁한 후, 이리저리 공부하면서 일정을 다짜고, 필요한 예약들도 척척 진행을 했습니다. 저는 숟가락만 얹어주는 자의반 타의반의 심정으로 떼르미니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지요.
첫날 저녁에 로마에 도착해서 자고 다음날 아침부터 바티칸 투어,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등 유적지를 보는 것으로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티비에서만 보는 오리지날 유적을 직접 보는 신기함이 크긴 했지만, 이때조차 제 마음은 '음~ 그렇군' 정도였네요.
바티칸의 투어가이드는 의욕이 넘쳐서 너무 말이 많았고, 콜로세움은 여기저기 공사중, 포로로마노에서는 작은 애와 제가 새똥을 맞기도 하는 등 기분이 아주 만족스럽지만은 않았어요. 아직 시차와 비행의 여독이 남아 있었던 데다가, 간혹 빗방울도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 탓도 있었고요.
다음으로 여행 3~4일차의 일정으로 계획되었던 것은 나폴리~폼페이~이탈리아 남부를 도는 가이드 투어였습니다. 우리 네 식구는 일정에 맞추느라 아침 일찍 서둘러 투어 집결장소로 향했습니다. 몇 번 가이드 투어를 겪어봤기에, 버스에 오르면서도 또 한번 시큰둥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러나, 좀 피곤했을지언정 저의 눈썰미는 버스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관리받아 빛나는 단발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그녀를 용케 알아챕니다. 운전석 바로 뒤, 버스 맨 앞 좌석에 홀로 자리 잡은 그녀.
소, 소, 소... 손담비다!!
당시 오랜 침체기의 끝자락에서 조금씩 활동을 재개하고 있던 중이어서였는지, 살짝 멋을 부린 정도로 그다지 연예인 포스를 내뿜지 않던 그녀를 다들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더군요. 아내와 애들은 물론이고, 투어 그룹의 젊은 신혼부부나 연인들이며 몇몇 어르신들까지.
하지만 촌티나는 시골 마인드의 소유자였던 저에게 갓 서른 시절의 아이돌이 열댓명 남짓의 그룹 안에서 1박2일의 투어를 함께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두근거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이탈리아 여행의 고단함도 잊은 채, '손담비다 손담비. 언제 아는 척을 할까, 뭐라고 말을 붙여볼까' 라는 생각으로 머리속이 가득 차버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옛날 연예인이 조용히 혼자 여행 중인데 괜히 아는 척 하는 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요.
버스가 경유지를 거치고 나폴리와 폼페이를 구경하는 동안 사람들도 조금씩 그녀의 존재를 알아 본 듯 했지만, 저와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섣불리 다가서는 사람은 없더군요. 그냥 옛날 연예인이라 시크하게 모른 척들 하고 있는 것 같았죠.
투어 첫날 일정을 그렇게 소득없이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손담비의 위대함에 대해 시큰둥한 아들들에게 설명하면서, 내일은 말을 붙이고 사진도 같이 찍으리라 결심을 다지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둘째날, 어느 새 지중해의 연변가도로 접어든 버스. 차창 밖 5월의 화사한 햇살과 레몬 나무 즐비한 풍경도 아랑곳없이,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던 제게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휴식을 위해 잠시 정차한 버스에서 내리니, 손담비씨 혼자 낮은 돌턱에 걸터 앉아 있더군요.
0과장, "사, 사진...(ㄷㄷㄷ) 찍어드릴까요?"
"아뇨, 많이 찍었어요. 가이드 언니가. (가이드와 며칠동안 동행중)"
"그..그러면, 저희 가족이랑 사진 한번만 찍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러세요"
0과장, "애들아, 아빠가 말해줬지, 이 분이 손담비야"
담비, 애들에게 "너네, 나 누군지 알아?"
애들, "네, TV에서 봤어요. SNL에 분장하고 나온 거, 헤헤"
담비, "헐~, 하필 거기서..."
그렇게 저희 가족이 먼저 사진을 찍고 나니 몇몇 팀이 쭈뼛거리며, 사진촬영을 요청합니다. 날은 청명하고 아말피의 해안은 윤슬 너머로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줍니다.
각자 점심식사를 마치고 가이드의 제안으로 각 가족, 커플 단위로 손담비씨와 기념 촬영 시간을 가집니다. 즐겁고 들떠하는 표정들을 보니, 다들 저보다 더 내숭을 떨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념 엽서에 등장하는 포지타노의 해변의 자연 채광은 완벽했고, 손담비씨도 피곤한 기색없이 마냥 즐거운 표정입니다.
그날까지 손담비씨와 함께 한 아름다운 이탈리아 남부 투어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와 다음날 렌트를 하고, 저와 가족들은 피렌체가 있는 토스카나의 도로를 질주했습니다. 너무나 신이 난 저는 무려 170유로짜리 속도 위반 딱지를 끊기도 했지만, 그후로 5일간 아름다운 토스카나를 즐기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7년전 5월의 추억 한 토막입니다. 그 추억 속에 출연해 준 손담비씨는 저의 행운을 다 가져갔는지, 그후로 몇년간 예능과 드라마에서 상을 휩쓸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고, 저는 그 모습을 TV로 볼 때마다 "우리 담비, 우리 담비"하며 그 때를 흐뭇하게 회상했습니다.
이 포스팅의 자료 조사차(?) 검색을 해보니 제 갓서른 시절의 여신이자, 아이돌이었던 그녀의 나이도 다시 한 번 저와 같은 앞자리가 되어 있네요.
주책없었던 추억담을 늘어놓다보니,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저는, 그녀는, 그리고 독자님들은 또 어떤 우연을 만나, 어떤 미래에 남을 추억을 새기고 계실지 문득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