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철학 한 꼬집
"아빠, 히케 버거 알아?"
아침 식탁에서 첫째가 내게 말을 건다. 중고등학교 내내 밝고 수다스러운 둘째와는 달리, 한 동안 말 수가 적어졌던 큰 녀석이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일은 어느새 내게 반사적인 반가움을 자아낼 만큼 귀한 일이 되어 있는 듯 하다. 깊지는 않았으나, 어쩔수 없는 약간의 암흑 기운과 적어진 말수로 티를 냈던 큰 아들의 사춘기가 이제 완전히 끝난 모양이다.
"히케버거? 모르겠는데? 새로 나온 거야?"
내 반문을 받은 아들이 말을 이어간다.
"아빠가 준 책('인간이 그리는 무늬')에서 그 사람(저자 최진석님)은 관념이나 개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물 하나하나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잖아? 그 부분을 읽고 나서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본 어떤 얘기가 책 속의 그 말과 연결되는 거 같아서. "
그러면서 아들이 들려준 얘기를 조금 정돈해서 소개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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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나중에 확인해보니 유명한 문인)이 친구하고 같이 미국 여행을 하다가 조그맣고 허름한 로컬 식당에 들어갔대. 뭘 먹을까 메뉴를 보다가 두 사람이 발견한 게 히케 버거. H-I-C-K-E. 둘은 해외를 왔으면 로컬 특유의 메뉴를 먹어봐야하는 거라며 그 메뉴를 시켰대.
그리고 버거가 나왔는데, 너무 맛있더라는 거야. 육즙이 어떻고 저떻고 떠들어대면서, 로컬에 숨겨진 맛집의 시그니쳐 메뉴를 발견한 기쁨을 만끽했대. 그렇게 신나서 버거를 먹는 동안 두 사람은 궁금해졌대.
'야, 이 버거 이름의 뜻이 뭘까 대체? 발음은 어떻게 하는거야? 히케? 히키?'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결국 종업원에게 저 히키인지, 히케 버거인지가 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종업원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아! 저거 치킨CHICKEN 버거라고 써놓은 건데, 메뉴가 낡아서 C랑 N이 떨어진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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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그 두 사람도 어이가 없어 현장에서 너털웃음을 터뜨렸을 것이지만, 듣는 나도, 말을 하는 아들도, 옆에서 듣던 나머지 두 사람도 재밌어하며 함께 웃었다. 거기에 아들이 이 이야기의 원전에는 없던 한 마디를 보탠다.
"이런 게 이름이라는 관념에 빠지지 말고, 개별적인 사물을 하나하나 만져보고 체험하라는 뜻인건가?"
읽은 것과 읽은 것을 연결해서 제 나름의 해석을 해나가는 녀석이 대견스럽다는 생각에 나도 한마디를 거든다.
"그렇네, 꼭 원효대사 해골물 같은 건가? 해골은 관념이고, 물은 사물인 것처럼"
말을 해놓고 보니, 히키버거와 원효대사 해골물이 어딘가 핀트가 어긋나는 듯도 하고, 맞는 듯도 해서 아들과 나는 모르겠다며 식사를 마저 끝냈다.
어쨌든, 이걸로 글을 하나를 쓸 수 있겠구나 여기며 정리해 보니, 두 이야기 모두 관념과 사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긴 하겠다 싶다.
히키버거는 '히키'라는 이름이 헛된 관념이 되어 사물에 대한 감각을 가린 나머지, 평범한 치킨버거의 맛을 원래보다 올려치기하게 된 경우일 것이다.
반면 해골물의 고사는 깜깜한 어둠의 도움으로 해골이라는 관념이 통제되고 나니, 그 안에 담긴 사물인 찬 물이 주는 가치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 된 것이었으리라고 그 의미를 나름대로의 맥락 안에 끼워 맞춰보게 된다.
이렇듯 확실히 관념이라는 것은 사물을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느끼고 경험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된다. 그것은 언어의 태생적 유래상 어쩔 수가 없기도 해 보인다.
"고로 언어의 탄생은 절대 논리적으로 진전된 것이 아니며, 안팎으로 진리의 인간, 과학자, 그리고 철학자가 후에 일구고 쌓아올린 모든 것들은, 'never-never land'(*존재하지 않는 이상향, 무릉도원)라는 땅에서 유래되지 않았다면, 사물의 본질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니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
하지만 이름이나 그릇이라는 관념에 속지 않고, 치킨버거와 물의 맛을 내 나름대로 온전하게 느끼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그 느낌을 소통하고자 할 경우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맛보고 느끼려는 진리에의 욕구에 못지 않게,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도 심원한 것이다.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는 꿀벌과 산짐승들조차 가지고 있는 인간 이전의 갈증이다.
원효대사님이 그 날 깜깜한 동굴에서 느꼈던 갈증이 그런 소통을 향한 갈증을 상징했던 것으로 좀 다르게 설정해 본다면, 그 고사의 해석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런데 내 체험을 명명하는 이름이며, 그 무형의 것들을 담는 그릇이기도 한, '언어'로 빚어진 관념들을 통하지 않고서, 내가 맛 본 치킨버거와 물의 맛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체험할 때는 언어 중추를 끄고, 표현할 때 다시 켤 수 있으면 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예민한 사춘기의 소년들은 어린이 시절의 여과없는 자신만의 체험 세계와 외부 세계가 사용하는 언어 사이에 놓인 괴리와 모순을 발견한 다음, 혼란스러워하며 잠시 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혼란을 나름대로 잠재우고 다시 소통의 세계로 방금 걸어 나온 아들에게 소통과 체험을 어떻게 화해시켰을지 자기만의 해답을 물어보고 싶으나, 아직은 참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