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더듬 읽기_미셸 푸코
1. 역사주의
헤겔식 역사주의는 철학 사조의 측면에서는 근대를 정의하는 사유체계이다. 전근대의 종교적 세계관의 극복이기도 하면서 파생이기도 한 그것. 인간이 마침내 스스로 신의 자리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보이는 그것. 신의 영광을 위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쳤듯, 시원의 이상으로의 회귀를 재촉하기 위해 또 수많은 주의자들이 아낌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그 안에서 인간의 조건은 역사가 향하는 정방향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확정될 수 있었다. 그런 의식화를 거친 주의자들은 순교자들처럼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고,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들도 공포스러운 공허로서 죽음을 인식할 필요 없이 크나큰 위안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의식화된 주의자들은 또한 통 크게 사랑한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현 인류를 넘어 역사의 완성의 경로를 함께 걸을 무수한 인간 동지들을 품는다. 하지만, 교조주의로 흐르지 않는 절대적 정향을 정의하고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머릿속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는다. 현시대를 사는 내게 이러한 역사주의의 한계는 비교적 자명해 보인다.
아시모프 식으로, 요즘 세상에서 엔트로피의 포화점이 태초의 창조 시점으로 이어지는 그런 순환이 진지하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검토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소설 속 순환 완성의 시점이 수 조년 이후, 혹은 시간조차 사라진 후라는 점이 타당한 설정일 수 있음을 부정하기도 어려우므로, 현재 인류의 인식 수준에서 그것을 놓고 원환적(annular) 진리의 가능성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지구 표면 위에 그어진 100미터짜리 트랙 위를 기어가는 개미에게 그 트랙은 직선이거나 드넓은 평면이지 원형은 아니지 않나.
2. 실존주의
독일 태생의 소설가 파트릭 쥐스킨트의 유명한 대표작인 <향수> 그리고 <좀머씨 이야기>. 나로서는 서로 공통점을 찾기 까다로웠던 이 두 작품 또한 그 교집합에 인간의 조건에 대한 작가의 은밀한 고민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봤다.
스스로 고유한 본질을 갖지 못하고 타자의 향기를 탐하고 훔칠 수 밖에 없는 텅빈 실존으로 정의된 인간. 또는 오로지 타인으로부터 달아나며 의미를 알기 힘든 자유의 추구와 차이의 생성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인간. 워낙 신비주의를 고수한 쥐스킨트라서 더더욱 그르누이와 좀머씨에 대한 그의 태도나 시선을 다른 자료를 통해 직접 들여다보기는 어렵지만, 그 둘은 실존주의가 제시하는 대자, 혹은 주체로서의 인간의 조건에 대해 내가 가지게 된 이미지와 거의 완전히 겹쳐진다. 텅 빈 인간의 본질. 그리고, 차이에 대한 추구.
그러나 이제부터 사유하는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보호해줄 안전장벽은 사라진다. 역사적 가치라는 인정도, 신의 구원도 기대할 수 없이 공허 속에 홀로 남겨진 인간은 자유롭고 황망한 걸음걸이 그대로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지고, 그걸 지켜보며 남겨진 인간들도 혼란과 공포로 밤을 지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최소화되어, 존 B 칼훈의 유명한 <쥐의 낙원 실험>의 마지막 세대인 ‘the beautiful ones’처럼, 짝을 찾거나 다른 쥐와 싸우지 않고, 그저 먹고, 자고, 손질하고, 자기애적 성찰에 싸인 채로 종족의 자연사를 맞을지 모른다. 뷰티 산업과 나혼자 산다와 먹방의 열풍 속에 0.7의 출산율을 기록중인 어떤 국가가 오버랩되어 섬뜩하다. 텅비었다 단정지어 버리기에는 인간의 삶은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것들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돋보이기 위해 그런 것들을 너무 빨리 내던져버리려 했던 지성들의 약빠름에게 이런 절멸의 가능성을 부추긴 다소간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 아닐까?
3. 구조주의
원환적 회귀라는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구별이 모호한 목적론적 역사에 대한 신념이든, 어떤 것에 구애됨 없는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고독한 인간의 발견이든 둘 다 인간의 현실 생활 위에 떠 있는 채로, 실증없는 관념의 차원에서 논의되거나, 삶에 들이닥치는 문제들의 개선이나 해결에 대해 곱씹을 만한 실용적 통찰을 제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정으로 실존주의가 니체가 던진 여러 가지 키워드 중 ‘신은 죽었다’와 ‘의지’, ‘초인’이라는 것에 나름대로 축자적으로 충실했다면, 역사주의와 실존주의 극복이 필요했던 구조주의는 ‘대지’라는 키워드에 집중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살고, 말하고, 노동하는 인간들의 생활상에서 공통되는 활동 자체를 인간의 조건으로 잡는다. 그를 통해 인간의 생명과 언표와 노동을 규율하는, 보다 강력하면서도 일상의 표면에 가려진 실체적 힘들의 존재와 작동방식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지금을 구조주의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학계가 아닌 현실 생활에서 이런 사고 방식은 상당히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구조주의는 역사주의와 실존주의 극복이라는 과제에 충실했고, 소기의 목적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정우 교수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근대 이후 서구 철학의 양대 전통이라 할 관념론과 실증주의의 분기점에 놓인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구조주의의 이 같은 성과는 실증적 증거를 중시하는 데카르트의 과학적 방법론으로 코지토로 대표되는 선험적 관념론을 극복하고자 한, 말하자면 데카르트를 통해 데카르트를 극복하고자 한 시도였던 것으로도 표현해 볼 수 있다.
다만 구조주의를 태동케 했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는 평가와는 별개로 인간의 위기는 그것으로 극복되지 않은 듯하다. 특히 AI라는 새로운 기술적 환경하에서 구조주의의 인간 조건에 대한 정초는 힘을 쓰지 못한다. AI는 말 잘하고, 일도 잘 한다. ‘살아간다’라는 또 다른 조건은 존재라는 단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조건으로서는 침묵한다. 어떤 면에서는 당장 닥친 AI라는 현상 앞에서도 인간의 고유함을 입증하지 못하니, 역사주의가 가졌던 무모한 용기조차 결여한 것 아닌가라는 비판을 모면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4. 푸코
구조주의는 태생이 태생이라 그런지, 인간 자체를 심도있게 고민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면, 실존주의적 인간상을 조금 보완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는 정도가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인간의 조건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AI라는 자신의 피조물 앞에서 조차 인간은 자신을 정의하거나 입증할 수 없게 된다. 레플리컨트로 의심받는 블레이드 러너의 주인공 데커트의 위기적 상황이 인류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같은 구조주의 무리로 분류되는 푸코의 <말과 사물>에서도, 인간의 조건에 대한 담론에 있어 전대의 철학들, 그리고 AI와 차별하는 단초를 발견할 수는 있다. 그것은 언어와 사유가 원래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추적하였던 노력의 산물들 가운데서 나온다. 처음부터 푸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관념론적 사유의 선언을, 구조주의 특유의 언어에 대한 집요한 고찰과, 막대한 양의 고증적 증거 수집을 통해 실증적인 선언으로 거듭나게 하려 했던 의도까지 가졌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원래 언어는 그것이 기호로서 표상하는 대상물들,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며 느끼고, 종합하고, 반성하는 인간의 사유 자체와 일치하지 않았다. 포르 루아얄(Port Royal)로 대표되는 고전시대의 언어 체계화 작업의 결과 등을 통해 갖춰진 그물망처럼 촘촘히 짜여진 언어의 구조 속으로 사유와 담론이 포획되어가면서, 사유는 언어와 불가분하게 된 상태가 되어, 그 후 몇 백 년이 흘러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언어는 그렇게 분절들의 계통이 이루는 체계여서 컴퓨터와의 상성을 이루고, 사유가 언어에 예속되어 있는 한 생각하는 존재는 말하는 존재 이상이기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어와 사유가 분리될 수 있다면, 언어, 언어 표상의 체계는 말 잘하는 AI의 것일 수 있으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그럴싸한 본질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생각들의 가장 앞단에 위치한, 솟아나는 미심쩍음, 갸우뚱거림, 불만족의 거스러미를 손톱끝으로 긁어서 당기면 언어의 표면, 언표의 장을 벗겨낸, 기호와 분리된 사유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The last question> 속에서도 인간은 우주 최후의 순간까지 AC에게 질문하는 배역을 맡지 않았던가.
5. 생각에 관한 생각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코지토는 신의 창조 외에는 그 기원을 마땅히 설명할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의 유구함 속에 일어나는 희박한 확률적 사건의 누적을 말하는 진화론이 있고, 뇌 신경세포의 전기 자극의 작용이 의식과 기억을 형성할 수 있음을 말하는 인식 과학과 뇌과학이 있다. 생각은 눈에 보이는 육체와 존재를 알 수 없는 영혼을 굳이 분리하지 않고도 가능한 것이 되었다. 어떤 선험적 관념에 기대지 않고도, 생각하는 인간이 제 발로 설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누군가에게 특별히 선물 받은 오성을 갖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동식물들이 고유의 독특함을 갖는 차원에서 인간의 육체를 통해 생각이라는 것이 생성되는 것이라 한들, 그 독보적인 특별함이 양적, 질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함, 미심쩍어함, 갸우뚱거림, 주저함을 우습게 여기고, 그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내 눈에 아름답지 않다. 떼를 지어 달려가는 것은 마사이 마라의 누우 떼라면, 자연의 장관이지만, 생각하기를 잊어버리고 한 철 유행을 좇는 인간들의 모습이라면 역겨울 때가 많다. 자신을 만족시켰던 어떤 감각이나 해명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다시금 물음표를 떠올리고, 그 충족감 안에서 금새 결핍을 생성해 내는 고질적 히스테리. 거기에 인간 본질의 한 자락이 빛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선물이면 선물인 대로, 그보다 더 희박한 우연의 누적에 의한 것이면 또 그것대로 이런 공백은 인간을 더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둘 다 얼마나 신기하고 어려운 결과인가. 또한 머신 러닝은 학습이라는 조건 데이터들 위에서 조건부 확률을 계산하고, 확률과 output의 사이에 놓인 갭을 메꾸기 위해 엡실론 항에 확률분포로부터 임의로 생성된 난수를 대입하여 어떤 답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말하기를 완결시킨다. 하지만 인간은 그 갭을 끝내 메꾸지 못하고 망설이며, 불안해 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유를 위한 뇌 신경계의 전기 교환은 반도체의 전기 교환과는 달리 좀처럼 완결을 보지 못하고, 그 불안의 경험도 신체 어딘가에 반드시 저장한다.
생각하는 인간은 갸우뚱거리고 주저하고 불편해하고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며, 달변의 기계가 아니다. 모든 것을 확신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늘 불안을 안고 산다. 그는 완전한 확신에 찬 바위같은 사람보다는, 흔들리고, 결핍을 안은 존재에게 더 끌린다. 그의 생각은 마침내 타인의 텅빈 그 공간에 이끌려, 특이하게 비틀린 모양새에 매혹되어, 영원의 맹세를 하고, 그를 위해, 그들을 위해, 그들의 후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놓기도 한다. 그의 생각은 완전무결한 합리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찾아내고, 생성해내는 작용이다. 생각은 언어로 인해 포장되고 오해되었을 뿐이고 이제 그 겹을 벗고 다시 인간을 정의하는 한 축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