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더듬 읽기_카뮈_시지프스 신화
1. 는쟁이벌
'는쟁이벌'이라는 곤충이 있다. 청남색의 광택이 나는 껍질에 둘러싸인 땡벌처럼 생겼다. 는쟁이벌에 관한 짧은 다큐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곤충 특유의 바지런한 몸놀림 때문이다. 장마철을 맞아 이것저것 시큰둥해진 채로 늘어진 내 감각에 포착된 녀석의 몸놀림은 자기가 태어난 이유에 대해 한치의 회의나 의심도 없는 모습이어서 오히려 색다르게 다가왔다.
짙파란 는쟁이벌 한 마리가 커다란 고목 위를 쉴새없이 탐색하면서 적당한 구멍 하나를 찾아낸다. 그러고 나서는 또 흙덩이, 먼지부스러기, 거미줄 등을 닥치는대로 주워다가 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그 구멍 틈틈이 채워넣으려고 숲과 나무 줄기를 오르내린다. 부산스러움에 그만 지쳤는지, 미동도 않은 채 잠시 게으름을 피우나 했더니, 햇볕 아래서 기력을 회복하자마자 다시 사냥에 나선다. 나레이터는 이 모든 바지런함이 종족 번식을 위해서라고 덧붙여준다. 좀전의 건축 작업은 알을 낳아 기를 거처를 마련하기 위함이며, 뒤이어 나오는 망설임없이 행해지는 사냥을 위한 몸짓의 시퀀스들도 자기 생명에 주어진 사명을 이행하기 위함에 다름 아니다.
는쟁이벌이 사냥하는 것은 희한하게도 바퀴벌레이다. 그 사냥 과정 또한 녹록치 않아 몹시 신산해 보인다. 일단 추격전이다. 재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바퀴벌레를 우리는 잘 아는 바, 는쟁이벌은 거의 지구전에 가까울 정도로 그 바퀴벌레를 쫓으며 기회를 엿본다. 잘 날지는 못하는 곤충인지, 둘은 내내 같이 내닫는다. 끈질긴 추격전 끝에 바퀴벌레 또한 작전을 바꾸어 길고 튼튼한 뒷다리로 추격자를 가격해서 튕겨내는 전략을 취해보기도 하지만, 마침내 추격자에게 기회를 허용하고 만다.
기회라 함은 신경독을 주입할 찬스를 말한다. 헛점을 포착한 는쟁이벌은 사냥감의 가슴팍과 목덜미 등에 벌침을 꽂고 독을 쏘아 넣는다. 여기서 독의 농도 조절이 중요하다. 왜냐면 반드시 사냥감을 생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1차 공격으로 바퀴벌레를 어느 정도 마비시킨 는쟁이벌은 바로 서둘러 사냥감의 더듬이를 짧은 길이로 뜯어낸다. 신경독에 의해 의지가 마비되고, 더듬이 손상으로 감각이 차단된 바퀴벌레는 이제, 완전히 는쟁이벌의 손아귀에 놓인다. 즉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고 적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는쟁이벌이 잡아끄는 대로 서서히 서서히 높은 고목 위쪽에 마련된 생사의 목구멍을 향해 끌려가는 것이다. 중도에 는쟁이벌이 다른 일을 보느라 잠시 자리를 비워도 바퀴벌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구멍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뒷발 돌기가 구멍 가장자리에 걸린 채로 어떤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은 생명을 지키겠다는 바퀴벌레의 가장 밑바닥의 무의식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끝내 무력했다.
구멍으로 끌려들어간 바퀴벌레 몸통 아래에 는쟁이벌은 쌀알처럼 생긴 제 알을 낳아둔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아직 며칠간 생명이 붙어 있는 바퀴벌레의 신선한 체액을 열심히 빨아들이며 제 몸집을 키워가고, 그에 껍질만 남을 무렵에 이르러 바퀴벌레는 죽음을 맞는다. 그 죽은 껍데기 안에 자리를 잡은 애벌레는 실을 뽑아 제 몸에 둘러 변태를 준비한다.
2. 소진
그 자연의 광경을 지켜보는 감정으로 말하자면, 일단, 고단할지언정 다음 스텝을 알고 있는 는쟁이벌 모자의 거리낌없는 움직임에 대한 경탄, 거기에 더해 언젠가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고 비슷한 이유로 인류의 공적이기도 한 바퀴벌레에 대한 대리 복수를 지켜보는 통쾌함도 있었던 반면, 더듬이를 잘린 채 는쟁이벌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무력한 모습에선 동료 생명체에 대한 모종의 연민마저 느껴지는 듯하여 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아함이다. 는쟁이벌은 하필 왜 그렇게 기이한 방식을 종족 번식의 방법으로 택하게 되었을까? 자연의 어떤 변곡점들이 그런 방식에 생존의 우위를 부여했을까? 는쟁이벌의 그 모든 움직임의 연쇄에서 나는 왜 '오,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삶을 꿈꾸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소진하라'는 카뮈의 인용을 떠올린 것일까? 그 치열하고 빈틈없는 활동은 말그대로 남김없는 소진의 이미지였기 때문이리라.
영혼의 불멸은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대지의 삶에 관한 철학과, 부조리에 관한 사유를 읽게 된다. 그 독서가 진지하고 만족스러웠더라도 남은 여생 는쟁이벌처럼 아들들의 생활여건이 더욱 안전해지도록 혹은, 그에 준하는 삶의 의미나 치열함에 봉사하며 나를 소진하는 것만을 내가 원할 수 있을지 자문한다면, 그 답이 선뜻한 'yes'는 아닌 듯 하다. 불멸은 아니라도 나 자신만의 내일을 예비하고 싶기 때문일까? 내게 허락된 생의 시간이 얼마일지 미지수인 상황에서 두뇌가 장기적인 신체 에너지 배분을 최적화하고자 회로를 돌리고 있기 때문일까?
는쟁이벌의 생이나 영혼은 단순하고, 나는 고차원적인 인간이라 그럴 수 없다는 어설픈 정향진화(orthogenesis) 류의 결론으로 그 차이를 메꿀 생각은 없다. 녀석들이 카뮈의 이상을 수행하는 방식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이상으로 기기묘묘하지 않은가.
어쩌면 그러한 소진의 생명 원리가 하릴없이 길어진 인간 수명의 시간 공간 속으로 내뻗어진 관성에 의해 우리는, 나는 공허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렇게 생겨난 축 늘어진 주름 같은 그 추가분의 시간을 그저 내 뇌신경을 즐겁게 하는 활동들에 소모한들 무슨 뒷탈이 있을 것인가? 거기에 어떤 낭비나 비난의 자명함이 있다면, 나는 푸코 같은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그것은 소진이 아니고, 대지가 원하는 삶도 아닐 것이다. 그토록 정성스럽고 성실한 조사를 통해 마침내 구축한 사유의 건축물들이 내게 한낱 무용함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의 무심함에 의해 운좋게 얻은 시간을 채우고, 휘발하는 감각을 만족시키는 무언가인 점에 단순히 만족해도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