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더듬더듬 읽기_파스칼 키냐르

by Zoroaster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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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끝에,
버드나무들, 그리고 산사나무와 섞여
개암나무들이 자라는 곳에
박하나무들 속을 비틀거리며 걸어
연못에서 1미터 혹은 1미터 반 되는 곳에,
가족이 입회한 가운데
유해가 뿌려졌습니다.

흩어진 유해들이 밤의 숨결 속에서
차츰 눅눅해지며,
느리게, 느리게 물로 젖어 들어가다가
이윽고 사라집니다.
입을 쩍 벌린 작은 잉어들과 모셈치들이 있는
물속에서 차츰 사라져 갔습니다.
희한하게도 물고기들의 입가에
하얀 테두리가 생겼네요.
참으로 아름답던 갈색 머리의
젊은 여인은 그렇게 잔잔한 회색빛 수면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갓 낳은 딸을
방 안 요람 속에
홀로 남겨 둔 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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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지금의 나는 타인이나 강아지나 꽃나무보다는 언어의 추상을 사랑한다. (사랑이 뭐든지 간에. 각자 자기만의 사랑을 정의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나). 그런 나는 타인에게서 언어만을, 언어를 통해서만 타인을 취하려고 한다, 점점. (우리들만의 방언을 쌓아온 가족 테두리 밖에서는,) 자신의 언어의 유리 표면을 내밀지 않거나, 내 언어의 유리 표면에 다가오지 않으면, 소용 없다. 매정하게 굴고자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다. 육체와 정신이 있고, 언어 말고 다른 매개로 표현된 정신은 대게 접근이 용이하지 않으니, 미적인 것들과 관계 맺는 방법은 제한적일 수 밖에.

시미언 피즈 체니의 정원에 채워진 것들도 내게는 살아 있는 새들과, 노랫소리와, 나무와, 연못이 아니다. 연못의 수면위에 뿌려져, 금새 가라앉지 않고 한참 표면을 형성하는 에바의 유골처럼 표면적인 언어들이 만드는 다른 향연이다.

그렇다. 모두 표면들이다. 속살, 점막, 점액질에 닿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무방하다. 표면도 내 안에 아름다운 감각적 체험의 표상을 만들어내고 남긴다. 본 적도 없는 그 정원에서 데려온 티티새는 새가 아니라, ‘티티’라는 경쾌함과 재잘대는 어떤 음율과 호로로 울어대는 음색, 짧은 날갯짓으로 이 나무 저 나무 부산스러운 움직임의 영상, 그 표상을 남긴다.(티티새가 날개 2미터짜리 거대 육식 조류여도 상관없다.)

산사나무, 개암나무, 박하나무를 구별할 줄 모르지만, 그 나무들에서는 시나몬 향이든, 제피 열매 냄새든, 엉겅퀴를 잘랐을 때 나는 하얀 진액과 함께 풍겨지는 풀냄새이든, 나의 지각이 경험하고 언어로 응고되어 저장되었던 감각들과 최대한의 연결점을 찾아, 그 풍경을 나름대로 그려내고 다시 언어로 담아두는 것은 만족감이 큰 감상의 과정이다.

황망하게 떠난 아내의 유골을, 그녀가 가꾸던 집안 정원 연못에 뿌리고, 무심한 잉어들이 몰려드는 장면을 그린 언어가 책을 통해 내게 오면, 나는 가본 적 없는 어떤 정원을 그려보고, 잉어들 입가에 생긴 하얀 테두리를 말하는 말투가 어딘지 무심한 듯 다정해서 더 슬프다고 생각하면서, 한참을 수면에 머물다가 하나하나 수면 아래 검은 곳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유골이, 언어가 내 마음에 상을 맺었다가 기억 너머의 깊은 어딘가로 가라앉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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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언)
밤색 벨벳 천을 씌운 상자야.
밤색 스웨이드 천.

(로즈먼드)
스웨이드 천이 뭔데요?

(시미언)
스웨이드 천이란
짧게 깎은 가죽,
그러니까 바짝 깎아서 거의 벨벳과
비슷하게 만든 보드라운 가죽처럼 무두질한
직물이란다……
나도 잘 몰라. 우리 어머니께 여쭤 봐야 해.

로즈먼드는 스웨이드 천을 씌운 작고 낡은 상자를 어루만지며 의자에서 내려온다. 아버지에게 상자를 건넨다.
그가 어렵사리 상자를 연다. 아니면 격식을 갖추어, 혹은 내키지 않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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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래 사랑하게 된 언어 자체는 마치 스웨이드 같다. 그것이 어디서 왔고, 애초에 무엇을 그리려던 것이든, 그 뜻을 알든 모르든, 어떤 감촉의 감각에 들러붙으면서 부드럽던 기억을 소환하고, 내 마음 속에도 무언가, 처음의 것과 같을 리 없는 하나의 덩어리를 남긴다. 스웨이드가 무엇이든, 시미언은 그 안에 아내와의 결혼반지를 보관했고, 그것은 벨벳과 같은 가죽 같은 부드러운 직물 같은 무언가로 옷장 깊이깊이.

문학의 언어 뿐만 아니다. 철학적 난문이나 신화들. 텍스트로 전해오는 다른 것들도, 내 경험이 완벽하지 않는 한, 그 텍스트와 내 내부의 언어들이 이루는 틀 사이의 거리감을 가늠해서 적당한 간격만큼 빈틈을 메꾸기 위해 상상과 (맞든 틀리든) 추론 따위를 열심히 동원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나를 내놓기 위해 이렇게 써보는 글들도 그렇지. 몇 줄의 모티브로 시작해서 내 안 어디에 감춰져 있는 작은 구멍으로 그 빈틈을 메꾸는 언어들이 자꾸 들어오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언어의 역동 자체가 가끔은 철학들이 얘기하는 어려운 것들의, 물질적이지 않으나 실재하는, 그런 실상의 하나인가 싶기도 하다.

책이라는 바깥에서 직접, 그것에 호응하여 내부에서, 그리고 바깥과 내부를 잇고자 작은 구멍에서 솔솔. 그것들이 그냥 흐르게 두어 볼 요량이다. 창문 밖에서 들여다보면 글이 어지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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