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바라보기
내 아이가 다른 아이와는 뭔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치료를 시작하면 금방 호전될 거라 믿었지만 몇 년간의 치료에도 발달 속도는 더뎠다. 결국 병원에서 ‘자폐성향이 있는 지적장애’라고 딱 진단명이 나왔을 때는 그토록 외면 회피하고 싶었던 진실에 마음이 무너졌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록달록 다채로운 세상에 사는데 나 혼자만 회색빛 세상에 갇혀 사는 것처럼 세상이 다 끝난 것 마냥 암울했었다.
나는 아이의 ‘장애’를 있는 그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벌어졌지?라는 원망과 함께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 아이가 아픈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나는 아이의 ‘장애’를 인정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또 장애라는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어떻게든 완전치료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치료에 집중하며 관련 책도 많이 찾아보고 나름 연구도 해보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기적처럼 ‘장애’라는 병이 고쳐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작은 희망을 품으며 당시의 아픔을 위로했었다.
아이의 몸은 계속 성장했다. 하지만 몸의 크기만큼 마음은 성장하지 못했다. 결국 ‘장애’는 고쳐지기는커녕 더 확실히 보일 뿐이었다.
아이가 장애 진단을 처음 받고 10여 년간을 고군분투했다. 처음엔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부끄럽게 여겨졌던 ‘장애’도 이제는 거부감 없이 인정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장애’에 대한 시각도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아이의 ‘장애’를 정말 ‘장애’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름은 그대로 수용하지만 장애와 비장애는 다른 것도 이상한 것도 불쌍한 것도 아닌 그저 ‘개성’‘특징’ 같은 것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기에 이르렀다. 이건 내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장애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바뀐 건 율이의 특성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가 다르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의 첫 다짐은 ‘고쳐야 한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였다. 근데 그것부터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율이의 장애는 원인불명이다. 그리고 원인이 있다 한들 장애를 고쳤다는 이야기는 책에서나 봤다. 타고난 게 원인인지 양육환경의 원인인지 기타 다른 문제가 원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장애라는 특성은 계속 안고 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건 고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특성으로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마다 고유의 성격, 특성, 갖고 있는 인격도 모두 다른 것처럼 장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 비정상의 개념으로 장애와 비장애를 나눈것 자체가 틀린거라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물론,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지속적으로 교육받고 치료해야 한다. 비장애인들이 학교에 다니고 가정이나 직장에서 교육받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나의 치료 목적은 장애를 극복하는데 초점이 있었다면 지금은 아이의 정서적 안정과 사회적응으로 바뀌었다.
나의 이런 장애에 대한 시각 변화는 나 스스로 상당히 발전했다고 여기고 있다. 일단은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더 따뜻해졌다. 예전에는 맥락에 맞지 않는 말들이나 공공장소에서의 돌발행동을 보면 창피함과 민망함, 수치심이 마구마구 올라왔었다. 내가 엄마이지만 타인이 내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 시선은 사실 동일 했었다. 바로 이상한 아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고 감당 안 되는 아이지만 내 새끼이니 감수할 수밖에 없지라는 마음가짐이었다. 엄마조차도 나를 온전히 바라봐주고 있지 않는데 아이가 그걸 모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말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아이들은 다 느끼고 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주는지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아이의 특성 받아들이기는 현재진행형이다. 특히나 컨디션 안 좋을 때 마구마구 쏟아내는 부정적 이야기에 계속 공감해줘야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 전에 미리 알아서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부담감은 여전히 있다.(요즘은 이 부분이 가장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 아이 화를 풀어주는데 나의 에너지가 바닥이 보일 만큼 너덜너덜 해지지만 아마도 사춘기가 지나면 점차 횟수나 시간이 짧아질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아이의 높낮이 없는 어투, 공공장소에서의 상황에 맞지 않는 큰 웃음소리, 커다란 몸동작 등으로 위축되진 않는다. 내 아이가 그런 건 특성이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나의 마음이 창피함 대신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엄마부터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타인들도 이상한 시선을 거둔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약 남들에게 피해가 갈 행동을 했다면 당연히 사과하고 수습은 하되 그것 때문에 숨지는 않게 되었다. 나의 이런 기세가 점점 더 강해지길 별 탈 없이 오늘 하루도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과 함께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