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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생각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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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송 Aug 31. 2024

두 번째 생각 - 관측에 대한 해석

우리는 어떠한 사물이든 필연적으로 감각 기관을 통해서 해당 사물을 인식한다.

당장 눈앞에 책이 있다고 하자.

책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일단 눈앞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은은하게 종이 냄새도 나고...

이런 감각 기관들이 종합되어 책의 존재가 증명되는가?

눈에 보인다는 것은, 광원으로부터 반사되는 빛이 우리 동공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과정이다.

만질 수 있다는 것은, 촉각기관이 보내는 신호가 뇌로 전달되는 과정이며,

냄새 또한 사물의 특정한 분자 단위의 기체가 후각 기관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아주 정밀한(인간이 구분하지 못하는) 기계장치로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눈앞에 책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든다면 - 실제로는 책이 존재하지 않지만,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냄새 맡을 수 있고 기타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든다면 - 그 책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사실 사물의 존재 여부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것에 대해 엄밀하게 따지자면, '존재'라는 단어의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물에 대한 인식이다.

내 감각기관으로 '인식'되는(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책이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행복일 수도 있으리라.

즉, 우리의 삶 또한 개개인의 정신에 따라 아주 다른 색깔을 가진다.

나는  긍정적 사고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삶을 관측할 수 있다.

 (여기서의 '관측'은 단순히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고차원적인 이해는 생략..)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관측'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이 여러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설명한다면, 각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만큼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 '관측'된다.

그리고 관측은 어느 정도의 통제가 가능하기에 아주 동일한 사건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개인에 따라서 아주 다른 사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어느 사건이든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수준은 온전하게 측정 불가능한 것이 우리가 '관측'하는 행위 또한 물체에 운동량을 부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명한 예시로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가린 채로 헬륨 풍선의 위치를 알려면 손을 휘저어야 하고, 손을 휘젓다가 손에 헬륨풍선이 닫는 순간이 '관측'인 것이다. 그리고 '관측'하는 순간 헬륨풍선의 위치와 운동량은 변한다.)

우리의 삶 또한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관측'이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삶'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관측이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우리의 삶 또한 우리의 뇌가 감각기관을 통해 관측한 사건을 해석하는 행동의 연속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리적인 측면에서 어떤 방식의 '관측에 대한 해석'이 우리에게 유리한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칼질을 하다 손가락이 베인 경우 아프지 말라고(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에 대한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병원을 가봐야 할 것이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해 "오늘 운수가 별로야. 되는 일이 없네" 또는

"크게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야. 다음부터는 조심할 수 있겠는걸?"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삶"이 되는 것이고,

모두의 "있는 그대로의 삶"은 아주 달라져 버리게 된다.

니체의 의견 중에, "도덕적 현상이란 현상에 따른 도덕적 해석이며, 도덕적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올바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삶에 대한 올바른 해석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존재를 떠나, 우리의 삶에 대한 관측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개인의 몫이다.

그리고 이 해석의 다양성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부여받는 자유의지가 아닐까?

이 자유의지를 온전하게 발휘한다면, 그 누구라도 본인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만약 현상에 대한 해석이 존재 여부를 판단한다면,

삶이란, 사건의 관측에 대한 우리의 해석으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물이라면,

행복감을 느끼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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