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망치를 든 철학자는 - 망치의 밀도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또 그 망치를 손으로 얼마나 세게 움켜쥐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 사정없이 그 망치를 휘둘렀다.
그리고 왜 이 시인의 말들은,
형용할 수 없는 황홀함과, 위로를 주는가?
어쩌면 종교보다도 더.
<도덕의 계보>에서 더 깊게 파고들겠지만,
니체는 도덕적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즉, 도덕은 해석이며,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특정 시기에 효용을 위해 '만들어진' 효용의 산물인 것이다.
또한, 힘에의 의지,
이것을 모든 생명체의 삶이자 근본 원리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
우리의 근본적인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는 것,
이것으로부터 니체의 관점주의 철학이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 인간들은, 우리 철학자들은,
'만들어진'도덕을 놓고 단죄하고, 용서하고, 판단하고,
-그 밖의 자유정신을 가진 이가 세상 속에서 서서히 미쳐가듯이-그렇게 살아간다.
시대에 효용에 맞게 '만들어진'도덕을 망치로 후려쳐서라도,
이 시인은 인간들이, 철학자들이,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기를 바랐나 보다.
나에게는 이 망치질이 희열감을 가져다주었으며,
큰 위로를 주었다.
우리가 쓰고 있는(벗을 수 없는) 검은 안경,
즉, 눈동자, (내 생각과 같아서 정말 놀랐다)
이로부터 새로운 현실이 생겨난다.
기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존재의 실제에 대한 사고조차 검은 안경을 쓰고 해야만 하는
그 인간적 부조리,
망치질을 당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심연으로 빠지게 두는 것이 아닌가?
또한 고통, 인간이라면 감내해야 할 고통을
왜 우리 인간들은 제거해야만 하는가?
고통 자체의 본질을 보라!
고통이 나쁜가? '나쁜 것' 또한 시대의 효용에 따라 바뀌는 것일 터,
고통이 나쁜가?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삶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
굳이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고통은 성장이다.
모든 동물들, 식물들, 우리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현실들에서
고통과 성장이란 단어는 도대체 누가 구분 지었는가?
시인은,
오류나 거짓됨,
이조차 삶을 위해 사용하라고 한다.
기존 가치에 대한 망치질,
과연 그 자체가 목적인가?
반드시 지금 내가 느끼는 황홀, 쾌활함을
모두 맛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시인이 말하는 '세상에 대한 공식'
이 또한 의심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그리고 그것은 무한 퇴행,
계속되는 물음표로 가는 것일지도 모르는-어느 정도의 모호함을 유지한다.
자유정신,
우리의 세상 속에서는 정신병으로 가는 지름길,
그렇지만, 나도 까마득한 옛날부터 추구해 왔다.
이 황홀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