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출혈로 동공이 풀린 내 남편 살려낸 사흘간의 기록
남편을 사선에서 끌어올린 숨가뿐 순간들, 세 번째 기록 입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계신다면 아들을 지켜낸 이 며느리에게 보상이라도 해달라고 떼를 쓰고 싶을 만큼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닷새 전 수술 때문에 많은 검사로 인해서 남편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다리도 휘청거리고 힘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날마다 뒷동산을 거닐고 헬스장을 가는 것이 우리 둘의 하루 일상이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휘청거린 남편을 두 손 꼭 잡고 괜찮겠지 잠시 피곤해서 그러겠지! 위안을 혼자서 하면서 힘없다는 남편을 데리고 갔지요. 그것이 뇌출혈의 무서운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가 이 글을 급하게 쓰는 이유는, 이웃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심정 때문입니다. 남편의 중환자실 면회를 마치자마자 바로 펜을 들었습니다. '그때 바로 병원에 가서 뇌 촬영을 했어야 했는데, 왜 몰랐을까?' 하는 자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날 헬스장에 가서 샤워만 하기로 했는데, 좋아하는 근력을 하려나 그냥 가려나, 제가 남탕에 들어갈 수도 없고, 체육관에 온 김에 운동을 조금이라도 시키고 싶었던 제 욕심이 이제 와 너무나 밉습니다. 그냥 데리고 병원부터 갈 것을, 운동이 대체 무엇이라고 그랬을까요!
그날 병원에 가서 뇌 촬영을 해볼 것을 제 가슴을 막 두들기며 통곡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 후회스러움을요. 저의 남편은 키 176cm 67kg 나이에 비해 근육맨이고 멋지다고들 합니다. 글쎄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 주변 분들이 그러시니 그런가 보다 합니다. 이렇게 건강해 보이던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네요."
"며칠 전부터 습진으로 가려워하던 남편은 병원 검사 후 피부과에서 먹는 약을 처방받아 왔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그 약을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습니다. 3년 전 코로나에 걸려 '팍스로비드'를 복용했을 때, 일곱 시간 동안 섬망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며 약물 부작용이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려움을 견디기 힘들었던 남편은 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틀간 약을 복용했습니다. 가려움증이 사라졌다며 좋아하던 남편은 결국 사흘째까지 약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심각한 변비가 찾아왔습니다. 남편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거의 30분마다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나오지 않는 변을 보려고 화장실에서 사투를 벌였습니다.
화장실에서 과하게 힘을 쓰면 혈압이 200까지도 치솟는다고 들었기에, 저는 화장실 문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변기에 앉아 한참을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그 무리한 힘주기가 결국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월요일에는 남편이 대변이 나오지 않아 괴롭다고 해서, 등대 해안길을 한 시간 넘게 함께 걸었습니다. 남편은 대변이 걸린 느낌이라 불편하다며 평소답지 않게 잘 걷지 못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변비 때문에 걷기가 힘든가 보다'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뇌출혈 증상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변비가 시작된 지 이튿날 아침, 동네 내과에 가는데 남편은 제대로 걷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변비 때문이라 확신하며, 휘청거리는 남편을 거의 안다시피 부축해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 앞까지 가서도 저는 '변만 시원하게 보면 다 괜찮아지겠지, 금방 좋아질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절대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리에 힘이 없고 휘청거리는 것은 변비 때문이 아니라 뇌출혈의 무서운 전조 증상이었습니다.
내과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고, 남편은 점차 기억력이 흐려지더니 목의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저 변을 보려고 힘을 너무 써서 뒷목이 아픈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저 변비만 해결되면 다 끝날 문제다'라고 믿었던 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변비약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뇌가 보내는 마지막 구조 신호, 바로 뇌출혈 전조 증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상태가 이상해 다시 내과를 찾았습니다. 약 부작용 때문에 남편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호소했지요. 당시 의사 선생님은 '신경외과'에 가보라고 권유했지만,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변'만 시원하게 보게 해달라고, 대학병원 의뢰서를 써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저를 무시하더군요. 이런 일로 무슨 대학병원까지 가냐면서요. 그때 제 고집을 꺾고 대학병원으로 바로 달려갔더라면, 상황이 여기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결국 내과에서 시키는 대로 항문외과를 갔습니다. 그곳 의사는 관장을 한 뒤 남편에게 힘을 다해 변을 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미 뇌출혈이 진행되어 뇌가 터진 줄도 모른 채, 남편은 죽기 살기로 힘을 쥐어짜며 변을 보려 무려 한시간 반동안 애썼습니다.
화장실에서 죽을 둥 살 둥 사투를 벌이는 남편을 보며, 마치 대변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오직 그것에만 매달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항문외과 원장님도 참으로 야속합니다. 환자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화장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까무러치는데도,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무리한 힘주기가 남편의 뇌를 더 처참하게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그때부터 남편은 정말 이상했습니다. 횡설수설하며 제대로 걷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관장하느라 힘을 너무 써서 기력이 다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집에서 겨우 10분 거리인 병원을, 남편을 거의 끄집어내다시피 부축해 오는데 30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길 가던 행인들이 저희 부부를 이상한 눈초리로 유심히 쳐다볼 정도였습니다. 몇 번이나 119를 부를까 고민했지만, '겨우 변비 때문에 119를 부르느냐'라고 혼이 날까 봐 머뭇거렸습니다. 그때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남편은 마치 섬망증 환자처럼 행동하고, 만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습니다. 우리 집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여기가 어디냐며 횡설수설했습니다. 저는 그저 너무 힘들어 일시적으로 정신이 혼미한 것이라 믿으며, 남편을 병원이 아닌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정말이지 제가 왜 그랬을까요. 왜 몰랐을까요. 후회로 가슴이 찢어집니다. 저는 그런 남편을 부축해 3층 집까지 밀어 올리다시피 해서 들어왔습니다. 남편의 옷에서는 대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저는 남편을 화장실로 끌고 가 씻긴 뒤, 수건을 기저귀 삼아 팬티에 대주었습니다.
기운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파김치와 그가 좋아한 깍두기 등 평소 먹던 대로 저녁상을 차렸습니다. 식탁에 앉은 남편은 젓가락도 쓰지 못하고 두 손가락으로 덥석 파김치를 집어 올렸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약 기운과 관장 탓에 기운이 없어서 그러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때 다시 대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다시 씻기기 위해 화장실로 데리고 갔을 때...
화장실에서 남편과 실랑이를 벌이다 오물에 미끄러져 함께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52kg의 작은 체구였지만, 남편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가까스로 남편을 거실로 옮겨 뉘었을 때부터 남편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진 듯했습니다.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119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응급 상황임에도 119에서는 묻는 것이 왜 그리도 많은지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집 주소와 환자 상태만 알면 될 것을, 같은 내용을 묻고 또 묻는 시스템은 정말 개선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10분 만에 도착한 세 명의 대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까 말한 내용을 반복해서 질문하며 시간을 지체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시 남편은 본인의 이름과 주민번호는 물론 부인 인적 사항까지 기억하고 대답했습니다.
대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을 그저 조금 취했거나 단순 기력이 떨어진 사람 대하듯 여유를 부리는 듯 보였습니다. 골든타임이 흘러가고 있는데, 국민의 세금을 받는 구급대원들이 환자의 위중함을 왜 몰라주는지 원망이 차올랐습니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구급차 안에서도 남편은 실수를 했는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런데 대원은 바람 불고 추운 날씨임에도 창문을 활짝 열더군요. 의식을 잃어가는 환자를 앞에 두고 그 냄새조차 참지 못해 환자를 추위에 떨게 하는 모습에 저는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제 남편은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그저 냄새나는 환자일 뿐인 것 같아 서글펐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저는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의료진이 CT와 MRA 검사를 권했지만, 저는 절대 뇌출혈이 아니라 약 부작용일 뿐이라며 거절했습니다. 내일 더 큰 대학병원에 갈 테니 오늘은 피검사 결과만 기다리겠다고 두 시간이나 버텼지요.
하지만 피검사 결과는 '이상 소견'이었습니다. 그사이 남편은 손을 떨며 점점 더 이상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결국 정밀 검사를 진행했고, 돌아온 대답은 '뇌출혈'이었습니다. 다행히 정맥 출혈이라는 진단과 함께 담당 의사 선생님이 시술을 위해 급히 달려오셨습니다.
그때 남편은 이미 동공이 풀려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 앞에서도 저는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이 사람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하늘보다 더 큰 희망을 가슴에 품고 또 품으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뇌출혈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잘 몰랐기에 오히려 무덤덤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의사 선생님은 바로 시술에 들어가셨고, 10분 남짓한 시술과 뒷정리까지 총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시술 후 선생님께서 혹시 모를 염려 사항들을 설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극심한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의사 선생님을 오롯이 믿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남편이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믿음'과 '희망', 이 두 글자가 남편을 살려낼 유일한 길임을 저는 확신했습니다.
비틀거림과 섬망 증상, 그리고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무감각함... 저는 그것이 뇌출혈의 징후인 줄 몰랐습니다. 그저 약물 부작용이려니 믿으며 사흘이라는 그 금쪽같은 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그놈의 ‘변비’ 때문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남편을 중환자실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세 시였습니다. 오물로 범벅된 것들은 다 버리고 남은 윗도리들만 챙겨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전혀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진동하던 냄새조차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저는 오직 '믿음'과 '희망' '신뢰'만을 붙잡고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남편을 살려만 주십시오. 그저 제 옆에만 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그 사람의 수족이 되겠습니다.
말을 못 하면 제가 입이 되어 말해주고, 먹지 못하면 제가 먹여주고. 병원에서, 약국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제가 대신 달려가겠습니다. 어디서든 그 사람의 이름만 들리면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입원 하루째 1월 21일 오전 7시가 안 되어 전화를 병원에 했습니다. 부리나케.. 아직은 병원인지 집인지 모르지만 의식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12시 면회 갔습니다.. 그 사람은 지난 과거를 하나도 기억을 못 했습니다.
병원을 CU라고 했습니다. 지인이 필리핀 간다고 했더니 왜 가냐고, 친구가 아프다고 하니까 본인이 잘못해서
아프냐고, 그렇지만, 부인인 제 주민번호와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본인이름, 주민 번호외에는... 다른 것은 아는 것이 없는 바보였습니다.
그래도 남편에 대한 애절한 희망, 의사 선생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하나님께서 남편을 제게 돌려주실 거라는 깊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책과 묵주를 가슴에 꼭 안고 밤을 새워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저 제 곁에 숨 쉬게만 해주십시오. 제가 그의 수족이 되겠습니다. 그의 입이 되고, 그의 발이 되겠습니다. 어디서든 그의 이름이 불리면 제가 대신 달려가겠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집안을 정리했다. 통장과 보험을 점검하며 돈 걱정 없이 남편을 돌볼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기력이 쇠한 그에게 먹일 낙지를 생각하며 억지로 기운을 냈습니다.
입원 이틀째인 1월 22일. 남편의 빈자리는 실생활의 무력함으로 다가왔습니다. 평소 남편이 도맡아 하던 세탁기 돌리는 법조차 몰라 삼성전자에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야 했으며. "이제 정말 모든 것이 내 몫이구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열두 시 면회 시간에 맞춰 남편이 좋아하는 휴대폰과 충전기를 챙겨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면회실, 남편의 침대는 비어 있었고, 예정된 심장 초음파 검사를 하러 가셨다고 간호사 분께서 30분정도 소요된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중환자실로 돌아온 남편에게 기억을 할 수 있는지 물었지요. "어디 갔다 왔어요?"
"초음파 하고 왔어. 아침으론 죽 먹었고... 그리고 화장실 때문에 힘을 많이 주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남편은 또렷하게 대답했습니다. 통장 위치를 묻자 "어머니 장롱 위에 있다"며 구체적인 장소까지 일러주었지요. 사흘 만에, 나의 남편이 온전한 정신으로 내 곁에 돌아온 것입니다.
남편이 중환자실에 사투를 벌이고 있는동안 우리가족, 동생, 시누님! 외에는 아무도 연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쏟아지는 지인들의 전화마저 받고 싶지 않았고, 남편의 가장 아픈 치부까지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과정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면도기 좀 가져다줘.][치약 칫솔 컵이랑]
카톡이 왔습니다. 이 소박하고 일상적인 요구가 이토록 경이로울 수 있을까요.
"여보, 더 일찍 병원에 데려가지 못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은 기어코 일어날 사람이라는 걸 나는 믿었어요. 당신의 면도기를 챙기는 내 손길에 이제는 자책 대신 '희망'을 담아볼게요.
당신이 제 곁에 오래오래 머물며 행복이란 완행열차를 다시 타기로해요".
뇌출혈이라는 무서운 병마 앞에서 우리를 구해주신
울산병원의 박현석 과장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