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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Dec 30. 2021

여자

여자, 기회

  여자, 나는 여자다. 누적된 학습에 의해서인지 현실이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난 여자라는 감옥에 갇혀서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쉽게 말해서 나의 발목을 내가 잡곤 한다는 말이다. 그 누구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알아서 혼자서 결정을 한다. 내가 원해서라기 보다는 주변 상황과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서 내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설 때가 많다. 어쩌면 그게 인생 여정을 안전하게 운행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모습들이 '나'란 개인의 성향인지 '여자'인 까닭인지 잘 구별이 안된다. '나'이기를 끝까지 주장하고 '나'를 세우기 위해 부득부득 우겨가면서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보다 더 매력적이고 멋있는 내가 되어있었을까? 또 굵직한 무언가를 이뤄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이다. 나를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하고 소심하게 연명해왔다고 표현할만한 발걸음을 해왔다. 뭐가 그리 무서우며, 뭐가 그리 겁이 났는지 정말 심하게 안전운행에 집착하면서 살았다.


  소심하다고만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표현이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할 말을 할 줄 아는 제법 용기 있는 사람에 속하니까 말이다. 남편과 나와 가장 오래 사귄 친구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있다. 별도의 장소에서 각각 우연히 말했는데 같은 말을 했다. "당신은 정치를 했으면 정말 잘했을 것이다."  나를 두고 나와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속으로 '어떻게 똑같은 말을 하지?' 하면서 놀랐었던 기억이 있다.

  

  나란 사람은 내가 처음부터 저지르는 배짱이 있는 사람은 못된다. 겁이 많아서 그렇다. 그러면서도 내심 누군가가 내게 CEO를 맡기면 엄청 잘할 자신이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대략 한 500명 정도의 기업을 운영할 자신은 있다. 눈부신 흑자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적자는 나지 않게 경영할 자신은 있다. 뭘 맡기면 아니 뭔가에 제대로 꽂히면 초 집중하고 죽기 살기로 하는 집념은 있다. 추진력, 결단력은 남편도 내 장점으로 말하고 어느 정도 스스로도 자신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겁이 장착되었기 때문에 앞뒤 구분 못하고 무모한 일은 안 한다. 워낙 겁이 많아서 스스로 처음부터 시작은 못해도 어느 정도에 있는 기업은 승승장구 까지는 아닐지라도 정말 튼실하게 키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나와 많이 달랐을까?'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여자였기에 엄마도 될 수 있고 아이를 낳는 기회도 갖고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최상의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남자였었다면~' 하는 생각은 한다. 우선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우리 집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종갓집에 딸만 넷인 우리 집은 종손인 우리 아버지의 한이 맺혀있다. 시제를 다녀오시거나 술 한잔 하시면 잊지 않고 하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조상님 뵐 낯이 없다." 스스로 아들을 낳지 못하여 대를 잇지 못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셨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우리 아버지는 정말 행복하게 열심히 사셨을 것이다. 물론 우리 엄마도 행복한 삶을 사셨을 것이다.


  정작 나는 어땠을까? 나는 스스로를 가로막는 행동을 지금보다 덜 했을 것이다. 슬프지만 나를 더 행동하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책임감에 눌리기보다는 책임감을 위해 더 도전하고 나의 경계를 뛰어넘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에게 더 많은 기회를 갖게 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해본다. 안 가본 길에 대한 무한 낙관론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보다 더 대범한 인생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어느 시대를 사는지 모르겠다.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차고 넘치는데 어느 나라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자라는 이유를 들어가며 스스로의 편견에 갇혀 사는 나는 소극적인 나의 모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여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해도 육십 년대에 태어난 나는 시대적 분위기를 체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꿎은 '여자' 타령이 아니라 현실이 그랬다. 딸 아들이 있는 집은 아들에게 기회를 주고 딸은 그 아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쩌면 딸만 넷인 우리 집은 큰 틀에서의 차별은 있었을지라도 소소한 생활에서는 적어도 남녀차별은 없었다. 여자뿐이었기 때문에 차별이나 비교 대상이 없어서 자동으로 차별이 해소된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서 좋은 점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를 낳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를 교육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여자이기에 엄마가 되었다. 세상에 떠도는 후진 말을 꺼내자면 '세상은 남자가 만든다. 그 남자는 여자가 만든다.'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을 여자가 만들 수도 있게 엄마는 딸을 교육시켜야 한다. 부족한 시대를 살아낸 엄마는 잘못된 학습으로 예전의 세상을 교육시켜서는 안 된다. 세상에 태어난 귀한 생명이다. 여자든 남자든 그냥 똑같은 사람이다. 똑 같이 기회를 줘야 한다.


  딸 아들 아들 그렇게 아이 셋을 낳았다. 첫 아이는 첫사랑이다. 나의 두 번째 이름이 생겨났는데 첫아이의 이름 뒤의 '누구 엄마'가 내 두 번째 이름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나는 대놓고 내 인생의 99%가 내 첫아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여자이거나 남자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첫 아이라는 게 더 중요했다. 딸이 태어나서 한없이 행복했고 한없이 사랑했다. 딸이라서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첫아이는 서툴기 그지없는 엄마 노릇의 희생양이기도 하지만 서툰 엄마인 까닭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집중할 수가 없을 정도의 정성을 다했던 엄마였다. 두 아들은 자동으로 컸다. 물 흐르듯이 순리대로 컸다. 성장기부터 남녀 차별은 없다. 앞으로도 개인의 성향이나 노력의 차이이지 성차별은 없다.


  나 스스로도 이제라도 내게 주어진 자유를 잘 활용하여 내게 기회를 주는 세상을 살기를 주문해본다. 이제라도 여자이기보다 사람이길 바란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이기보다 '나'이기를 바란다. 내게 한마디 한다. "막지 마라,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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