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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Jan 03. 2022

운명

운명

  사람의 탄생과 사망 그리고 결혼은 운명인 것 같다. 연이라고 할 수 없는 필연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생과 사는 운명이라고 수긍을 하겠는데 결혼까지 운명일까? 하며 의문을 갖은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본인의 선택이지 무슨 그게 운명일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인생에서 부모에 의해 태어나는 것 못지않게 부모가 될 수 있는 부부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여러 경우의 수 중에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는 것은 운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운명이 아니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발가락이 닮았다. 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유전되는 것이 발이라고 한다. 발만 유전 확률이 높은 게 아니라 각종 질병도 유전 확률이 높은 게 많다. 생물학적 유전 확률인지 식습관이나 여러 가지 생활 습관을 공유하게 되어 생기는 현상인지 그 경계가 불분명할 경우가 많다. 그러고 보면 부모와 자식은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일체감이 있지 않나 싶다. 서로 뗄랴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말이다.


  부모 그리고 자식, 그 관계의 인과성은 무섭기까지 하다. 부모가 잘 살아야 그 부모를 보고 배우면서 닮아간다. 좋은 점들도 많이 닮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이 닮았다. 쉽게 말해서 나쁜 점은 더 잘 배우는 것 같다. 정말 진절머리 나게 싫은 부모의 그 어떤 면을 죽어도 닮지 않겠노라고 다짐 다짐하지만 어느새 그렇게 닮아 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도 있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은 거울이고 가장 강력한 사제지간이다.


  결혼은 중요한 선택이다. 사람들은 좋을 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일생을 같이할 배우자를 결정할 때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만 먹고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아직 살아보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질지를 예견하기도 한다. 그 중요한 표본이 상대의 부모다. 보고 배운 게 각자의 부모이기에 부모들을 보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배우자가 될 수 있는 상대의 부모님을 살피게 된다.


  안 해도 되는 걱정을 사서 해서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모든 건 본인 할 나름이고 어쩌지도 못할 경우에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별 뾰족한 방법이 없을 때도 있다. 산다는 게 그렇게 예측하는 대로 다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조심한다고 배우자가 될 수 있는 부모의 삶까지 살피려다가 일생 찾아오기 힘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불상사도 생긴다는 말이다. 매사에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진짜일 경우가 많다. 여러 가지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일 수가 있다. 본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위하는 게 그게 진짜라는 말이다.


  내가 사실 어제저녁에 드라마틱한 다큐를 보았다. 이혼 남녀가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프로그램인데 아이가 없는 남자와 어린아이가 있는 여자가 만나는데 하루는 여자의 아이와 지내는데 갑자기 남자가 울컥하여 화장실 행을 했다. 여자가 왜 그러냐고 묻자 부모님이 생각나서 그런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었다. 그런데 어제저녁 그 남자는 삼십 대 중반인데 우연히 3년 전에 자신의 부모가 친부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혼자만 그냥 아는 상태로 지내다가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부모에게 사실을 듣고 싶다는 말을 해놓고 답을 듣기로 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부모처럼 자신도 친자가 아닌 어린아이의 아빠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부모와 자식 그 알 수 없는 운명의 고리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게 만든다.


  계속 그 여운이 가시지가 않는다. 드라마틱하다는 관객의 눈으로만 보기에는 그 남자가 많이 마음에 쓰인다.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또 다른 운명이 자신도 모르게 엮이면서 그것도 본인이 되어간다. 슬픔이나 그렇게 흔한 단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묵직함이 사람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절대자의 농간인가?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본인이 커 왔던 것처럼 본인과 같은 어린 생명을 부모가 되어 키워야 하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누가 만든 시나리오인가? 인생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이미 본인의 부모의 삶이 본인의 삶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걸 의식하지 못하고 낯설어하면서 난생처음인 것처럼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도 무섭다. 얼마나 얼마나 잘 살아야 하나? 내 삶이 내 삶만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내 삶이 나의 자식의 삶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진정 사실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경우를 보곤 한다. 무당인 조상의 후손은 또 무당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이 또 이혼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주홍글씨와 같은 삶이 자신에게만 처해지는 운명이 아니라 후손에게 까지 답습이 된다는 건 정말 정신 바짝 차려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 좋은 경우들은 크게 낙인이 되어 남는 경우가 없다. 버리고 싶고 아니었으면 좋을 것 같은 일들은 강력하게 흉터가 되어 남는다. 큰일들이 강력하게 남지만 알고 보면 그 큰일들이 사실은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충분히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간과하고 넘기는 바람에 큰 흉터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너무 커져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면서 그것을 간혹 운명이라고 명명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남남이 만나서 부부가 되면 처음엔 서로 배려하고 살다가 어느 한쪽에서 익숙함에 안하무인 하게 되고 그러다가 다른 한쪽에서 참을 수 없게 되어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게 될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그런 삶이 자식에게도 답습되는 경우도 있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다. 작은 노력과 배려로 행복을 일궈갈 수도 있는 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그 누구보다 내 자식들에게 그 씻을 수 없는 상처가 가장 크게 남게 되고 또 그걸 똑같이 답습한다는 생각을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내 노력으로 방지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부터 작은  노력을 실천하는 하루를 살아야겠다. 내 자식들에게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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