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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Jan 04. 2022

오늘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하고 각자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으면 어느덧 백세의 종착지에 다다를 것 같다. 무엇이 그들을 교란시키는지 가야 할 그 길이 순탄치가 않다. 왜, 다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좌충우돌해야 하나? 그 무엇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소리가 나는 걸까? 정글 속의 짐승들은 힘에 의해 포획당하지 않기 위하거나 약육강식의 먹이사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치열해야만 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인간인 우리네는 무엇이 그렇게 치열하게 하는 걸까?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욕 때문일까?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어느 누군가는 피와 눈물을 흘려야 할까? 그다지 그렇게 남달리 잘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다들 왜 그러는 걸까?


  사람들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하나하나 보이는 게 많아서 일까? 실망스러운 것도 많이 보인다. 늙으면 귀도 어두워지고 시력도 낮아지는 게 다 이유가 있는데 왜 나는 안 보았으면 좋을 법한 것들이 자꾸 보이는 걸까? 안 들었으면 좋았을 말들도 듣게 되어 지하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도 맛보게 되는 걸까? 누구의 문제가 아니다. 다 나의 문제다. 상대가 그렇게 봐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바보처럼 내 마음대로 좋게 보고 기대하고 그랬을까? 바보처럼. 내가 보는 대로 상대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겠거니 하는 나만의 착각, 그게 주범이다. 슬프다. 무엇을 위해 원하지도 않는 불투명한 안경을 끼고 귀마개를 하고 살아야 하나? 뭐 그렇게 대단한 걸 얻는다고? 뭐 그렇게 대단한 게 있기는 하는 걸까?


  가끔은 깊은 산사에서 새소리 바람소리만 듣고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무념무상의 시간이 간절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실행하지 못한다. 바람으로만 남는다. 생활인으로 살아야 하기에 속세의 소리를 모두 감당해야만 한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나만의 필터를 돌려야 한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다. 슬픈 현실이지만 나만의 주문을 읊어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를 바로 세워서 다시 걷게 한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때는 '숙제'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앞뒤 꽉 막힌 나는 애초부터 땡땡이를 칠 위인이 못된다. 그놈의 숙제를 안 할 배짱이 없다는 말이다. 속으로야 어찌 생각하든지 나는 그 숙제를 꾸역꾸역 해낼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소중해지기도 하고 생명의 귀함을 깨우치게 되기도 한다.

 

  완벽한 신이 아닌 사람이기에 의도치 않게 잘못을 하기도 한다. 잘못을 하게 된 상대를 위해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필수품들이 있다. 미흡한 무엇인가를 치유하고 복원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게 아닌가 한다. 생뚱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 생각엔 그게 '용기'가 아닌가 한다. 미안한 사람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게 함께 살기 위한 필수품이 아닌가 한다. 훌훌 털고 산속에 들어가서 살고 싶기보다 서로 기대고 함께 살고 싶어 할 수 있는 그 말 한마디, 그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게 아닌가 한다. 서로 힘겹게 살아가는 상대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이 두 마디가 피로회복제요, 힘이 되는 원기 회복제가 아닌가 한다. "사랑한다."는 꽃이라면 "고맙다." "미안하다."는 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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