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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Apr 14. 2022

권리와 의무

권리와 의무

  인생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막연히 '숙제'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달리 생각나는 게 없어서 '숙제'라고 답할 것 같다. 십 대 때는 나름의 고민이 있었겠지만 그때는 부모님 그늘에서 살아서 내 인생이 온전히 내 몫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었던지 뭐가 묵직하게 내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취업을 하고 급여라는 걸 받게 되면서부터 그 어렵게 살았던 부모님 그늘에서의 그때가 좋았었다는 걸 실감했다. 그 누구도 내가 급여를 받는다거나 소득을 얻어서 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기대도 없어서 나는 그냥 홀가분하게 살 수 있었다. 취업을 하여 급여를 받게 되면서부터 사람 도리를 해야 한다는 과제가 내게 생겼다. 그때부터 사람 도리 하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과 사람답게 살기 위해 부단히 마음을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말이 쉬워서 '쉽기만 한 게 뭐 인생이겠냐?' 하면서 기꺼이 어려움을 이겨낼 것 같이 말하지만 막상 닥치면 정말 쉽지 않은 게 인생이다.


  사람이 나이가 먹어가면서 나이에 비례하게 책임이 늘어난다. 사람의 성향이 조금씩 달라 그 책임을 크게 느끼지 않고 방관하거나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가뿐히 잘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은 정말 큰 책임감을 느끼면서 잘 해내야 한다는 걸 인지하면서 그렇게 썩 마음처럼 잘 해내지 못하는 본인을 바라보면서 힘들어하곤 한다. 그 보통사람 중에 한 사람이 나인 것 같다.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일을 열심히 해야 될 시기에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자식을 기를 때는 자식을 열심히 길러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늙으신 부모님을 모셔야 되면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한다. 이렇게 인생 주기별로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십 대는 아름다웠고 이십 대는 멋있었으며 삼십 대는 행복했고 사십 대는 치열했으며 오십 대는 비로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읊어 왔다. 그런데 그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시기에 연로하신 부모님이 편찮으시게 되면 막상 쉽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성심껏 잘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막상 하려고 하면 그게 나 스스로의 건강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상황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음처럼 따라주지 못한 여러 여건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잘해야 된다는 마음과 그렇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 자식들을 기르듯이 '그냥'이 되지 않는 것도 큰 장애물이다. 자식들은 하나 낳아 기르기도 쉽지 않다는 요새 세상에 물정 모르고 셋씩이나 낳아 기르면서 그 어느 누구한테도 힘든 내색 안 하고 길렀다. 속마음은 "누가 너희 더러 셋을 낳으라고 했니?" 이런 말이 들릴까 봐 더 아무 말 없이 꿋꿋이 길렀다. 그런데 우리 엄마 자식이 나 혼자였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는 혼자 감당했을 텐데 자매가 넷이라 서로 나눠서 감당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건 참 중요하면서 쉽지 않다. 그 누구의 시선보다 스스로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냐고 묻게 되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현재 놓이게 된 자식 도리를 잘 해내지 못하여 많이 불편하다. 좀 애써보면 내 몸이 이상현상이 일어나서 뒷감당이 안되니까 더 무기력해진다. 스스로의 한계를, 그 바닥을 훤히 들여다보게 되면서 편찮으신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만 커진다. 더 나빠지지 말고 이대로라도 잘 버티시길 바랄 뿐이다. 늘 해왔던 기도를 한다. 우리 조상님들께, 우리 엄마 좀 잘 살펴달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존재의 부족함을 실감하게 된다. 더 작아질 수 있을까? 이런 마음, 내가 더 열심히 살아서 거뜬히 더 좋은 환경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든 실천이 답인데 바람만 헤아리게 된다.


  '누가 인생은 아름답다 했는가?' 이런 노래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뭐든 그 어느 때든 아름답거나 행복하거나 하는 플러스 기운은 '찰나'였다. 그 찰나의 순간을 얼마나 반복하여 생각하느냐 그리고 더 많이 느끼느냐에 따라 인생이 핑크빛의 영역과 회색빛의 영역의 비중이 정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생명의 고향이면서 내 전부였던 엄마가 편찮으시니까 온통 회색빛이다. 병원을 옮기면서 더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되니까 그 헤어짐이 얼마나 마음 아프던지 참을 수 없는 눈물은 그 어떤 언어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단지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이런 마음만 더 커져갔다. 연세가 많아 치료하기가 아무리 어렵다 하여도 엄마는 그냥 내 엄마 이기에 간절히 치유되길 바랄 뿐이다.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불효자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점점 의식이 또렷해져서 인지능력이 눈에 띄게 좋아지시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실 감사하다. 비록 부족한 딸이지만 한 번씩 손 마주 잡고 눈 마주치면서 "엄마, 파이팅!" 할 수 있는 지금이 감사하다.


  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면서도 커져가는 책임과 의무를 거부할 수가 없다. 어쩌면 커져가는 책임과 의무가 내가 해낼 수 있는 나의 크기 인지도 모른다. 해야 되는 일 앞에 작아만 지는 나지만 그래도 해야 되는 것들이 크게 다가온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해석을 하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나도 모르게 나는 커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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