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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May 19. 2022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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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꼭 집엘 오면 올 때마다 꼭 별을 보더라." 엄마가 하신 말씀이다. 별을 보는 날 보고 계신지도 몰랐는데 그런 날 보고 말씀하셨었다. 시골집에 가면 좀 많이 불편한 게 화장실을 이용하는 거다. 안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데 연결되어 묻어둔 탱크가 다 차게 되면 비워야 하는 일이 큰일이라 별채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한다. 마당 건너에 있는 별채 화장실은 불편하지만 갔다 오는 길에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볼 수 있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집 마당 위의 별들은 그 어디에서 보는 것보다 더 많다. 많은 별들 때문인지 밤하늘은 까맣지 않다.


  밤하늘만 감탄사의 촉매제가 아니다. 여명은 더 아름답다. 그 오묘하면서 찬란하고 다채로운 빛깔은 그 눈동자가 떠오를 수 있도록 준비라도 하는 양 쉼 없이 움직인다. 너무 아름다워서 가족들을 흔들어 깨워 보게 하고 싶지만 그들의 원성을 살까 봐 참곤 하면서 맑은 대낮에 기회가 되면 이른 새벽하늘을 보라고 권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동하는 경우도 많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물컹한 감정선은 울컥거린다. 지금은 덜하지만 어릴 때 노래를 배우다가 노랫말 때문에 눈물 콧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때가 많았었다. 노래를 듣기만 해도 뭉클한 무언가가 꿈틀거려 그런 나를 감추려고 등을 돌리기 일수였다. 스포츠를 관람할 때도 우승의 주인공보다 내가 더 벅차 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TV를 시청하다가도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곤 한다.

 

  나의 감정선은 좀 유별나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나는 음악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창작의 작업을 통해 감동적인 작품을 생산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씩 시도는 했었다. 음악은 작곡법, 화성법 그런 책을 샀었다.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었다. 그림은 근 십여 년을 그리고 전시하고 삼매경에 빠져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글은 어릴 적부터 책 한 권 쓰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마음에 품고만 살았다. 기회가 되면 배우고도 싶었다. 배우기도 전에 이런 공간에 이렇게 쓰고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단 말이 있다. 딱 지금 내가 그런 경우다. 두리번거리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다가 맞춤법 검사 한 번 하고 바로 끝이다. 그런 내가 참 답이 없다는 생각도 하면서도 날 것의 미학이 분명 있을 거란 생각 아니 위안도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글이 쓰고 싶다. 생활인으로써 피로감에 몸이 저 밑으로 가라앉을 것 같고 눈은 염증으로 시달리면서도 난 이 못난 글이 쓰고 싶다. 그림을 그릴 때도 그랬다. 글을 쓸 때보다 더 행복했다. 결과물이 어떠하든 과정은 적어도 행복했다.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 정도는 될 그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웃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무모하게 무언가를 기뻐하며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혹자는 프로답지 못하고 발전을 스스로 차단하는 거로 이해할 수도 있다. 빨갛게 불태우며 달려야 하는 일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글은 그렇게 불태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어서 다행이다.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뭘까? 나는 무엇이든 유의미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특히 창작활동을 하면 내 영혼에 식량을 제공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지금까지의 나의 글은 나의 발견이며 나의 정리였다. 뭐 딱히 창작이라고 할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그래도 좋은 걸 보면 내 속에 나도 눈치 채지 못했던 허영기가 있는지도 모른다. '허영?' 그런 말을 하니 너무 과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책을 읽으면 충전이 되는 기분이 들듯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낙수물만큼의 영향력이 있길 희망한다.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뭐라 말할까? 덤으로 누군가에게 감동이 되면 더 행복하겠지만 그보다 더 먼저는 나를 위해서 글을 쓴다. 한 푼 두 푼 모아 보험을 들듯이 늙은 나를 위해 나는 글을 쓴다.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서라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젊은 날을 되뇌고 싶다. 굵게 주름진 내 얼굴에 연한 미소가 번지기를 바란다. 지금도 낡은 전지가 접촉 불량일 때처럼 언뜻언뜻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을 못 하곤 하는데 십 년 후 이십 년 후의 나는 상상하기 싫은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럴 때 내가 쓴 글을 보면서 추억하고 싶다. 뭉클했던 내 아름다운 젊은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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