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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Jun 14. 2022

나 극복하기

  세상사 사노라면 수학 공식 같은 삶의 공식을 공감하곤 한다. '고생 총량의 법칙' 이런 말이 있다. 일생 동안 겪어야 할 고생이 일정량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라고 알고 있다.


  고생이 선택할 수 있거나 경중을 조절할 수 있으면 그건 이미 고생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고생하는 건 그래도 참고해볼 만할 것 같다. 그런데 건강 관련 고생이나 가정사 등 오묘한 빛깔의 고생은 참 난감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경우일 것 같다.


  미래를 위한 고생은 가능하면 진하게 초년에 해서 삶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외의 고생은 가능하면 일생 동안 고루 분배해서 고생이라고 체감하지 못하고 넘기면 좋을 것 같다.


  개인 차이 또는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고생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들 중에 개인적으로 반감을 느끼는 말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 '신은 감당할 만큼의 고난을 준다.' 이 두 가지 말이다. 웬만하면 그런 말이 위안이 되기도 하겠지만 고생의 정점에서 과연 위안이 될까 싶다. 차라리 '고생 총량의 법칙'이 더 희망적일 것 같다.


  공감하는 말이 또 있다. 이 말을 하면 자칫 꼰대 같다고도 생각할 것 같다. 혹자는 성공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주 흔한 말, '하면 된다.'이다. 성공하지도 않은 내가 뭘 또 그 말을 공감하고 그럴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누가 뭐라 해도 그 말은 평범한 상황에서는 진리가 아닐까 싶다.


  '하면 된다.'는 말 앞에 난 고해성사처럼 날 해명해야 할 것 같다. 난 무언가를 실현할 정도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노는 삶도 안 살았다. 쉽게 말하면 어중간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정상 위에 깃발을 꽂아보지 못했다.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내가 원하는 통쾌한 업적이 없다.


  용이되지 못하고 이무기로 머물러 있는 현실이, 그런 나를 너무나 선명하게 알고 있는 내가 측은 하다. 스스로 치열하게 살았다고도 하고 기본이 범생이라 뚜벅뚜벅 성실하게 걸어왔지만 2%가 부족했다. 뒤돌아보면 더 간절했어야 했고 더 집중했어야 했다. 어느 선까지 이르게 되면 난 내 벽에 막히고 말았다. 이런저런 구실과 핑계를 내 머릿속에 나열해 놓고 적당히 타협했다.


  내가 그린 목표도 흐릿했고 내가 할 수 있었던 노력이나 방법도 한참 부족했다. 용기가 부족했으며 인생을 늘 안전 운행하려 했었다. 분석컨데 나란 사람은 할 수 있었다. 지 성공한 사람들 만큼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다. 아니 더 중요한 건 간절함이 부족했었던 게 원인 같다.


  스스로에게 느꼈던 갈증을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외웠다. '하면 된다.' 표면적인 읊조림이 아니라 진심으로 믿는다. 하면 된다고. 단지 난 노력과 간절함이 부족했었다. 하면 된다고 믿는 건 내게 노력할 수 있는 힘도 간절함도 잠재되어 있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실천하지 못한 나를 타박하지만 뭐든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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