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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Jun 11. 2022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2

걱정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답은 '칭찬'이었다.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의 나의 에너지는 '칭찬'이었던 게 맞다. 물론 지금도 그 '칭찬'에 엔도르핀이 확 돈다는 걸 체감한다. 아마도 늙어 죽을 때까지 나를 가장 살맛 나게 하는 건 '칭찬'일 거라 생각을 한다. '칭찬'이란 단어 속에는 관심과 사랑이 들어있다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걱정'이란 단어 속에도 관심과 사랑이 들어있음을 눈치채 버렸다. 칭찬은 받아서 힘이 생기고 걱정은 사랑이 있어서 걱정하는 것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논리성이 일도 없는 논리를 펴보자면 오십 이전은 받는 사랑인 '칭찬'이 내게 더 영향력이 있었고 오십 이후엔 내가 누군가를 향해 주는 사랑인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의식하게 되었다. 오십 이전에도 내 자식을 사랑하였으나 그때까지는 사랑의 대상인 자식이 아직 미성년이라 함께 뛰는 일이 많아서 나 홀로 그들을 걱정하고 있는 일이 드물었다고 보면 될 것 같고 오십 이후엔 성년이 된 자식들을 향해 몸은 놓아주었으나 마음은 늘 그들을 '걱정'하고 있어야 해서 '걱정'도 사랑이란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부모는 그들의 성장을 위해 온전히 놓아주어야 한다. 그래도 부모는 그게 쉽지가 않다. 팔순의 노모가 환갑인 아들에게 차조심하라고 당부를 하는 것처럼 부모는 이론처럼 그렇게 쉽게 완벽하게 자식을 놔지지 않는다. 그래서 몸은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늘 그들을 걱정하고 산다. 그들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겠지만 부모도 그들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걱정하고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수도 있다.


  다 큰 자식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참 쉽지 않다. 그런 말을 오늘  첫째와 셋째에게 했다. 기말고사 기간인 둘째에게는 참았지만 첫째, 째에게는 그 어려운 말을 했다.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잦은 여행을 하는 큰아이에게 뭐라 말을 했었다. 그래 놓고 지적해서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그런 엄마에게 소리들을 줄 알면서도 늘 정직하게 대답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셋째에게는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간절할 텐데 통화할 때마다 '열심히 해라.'라고 말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하는 나도 싫은데 묵묵히 화 한번 안 내고 처음 듣는 것처럼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그러면 모든 게 용서되는지 모르겠다. 걱정된다는 이유로 매번 같은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묵묵히 받아주는 아이들에게 자발적으로 미안함을 느낀다. 원하고 걱정하고 그게 내 남은 삶의 전부일 것만 같은데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 내가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싶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도 생각해본다. 말로 표현을 안 하고 그냥 마음속으로 걱정만 하는 건 그래도 좀 괜찮을 것 같은 생각도 다. 신이 내게 축복 같은 자식을 맡기면서 선물 같은 사랑 보따리도 함께 주었는지 자식을 향한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으니 스스로 자각하고 제어 조절하는 지혜를 기르는 게 과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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