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long Nov 30. 2022

나의 바람

나, 기대

  텃밭 언저리에 감나무가 있다. 빨갛게 익은 감들을 까떼가 쉼 없이 와서 쪼아 먹는다. 감나무 밑에 있는 배추밭의 배춧잎들은 까치 배설물로 바닷가 바위 위의 석화처럼 덕지덕지 말이 아니다. 배추가 제 역할을 할까 걱정도 되지만 순전히 콘크리트 투성이의 대도시에서 시골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것이 여간 여유롭고 푸근한 게 아니다. 그나저나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또 가을도 가는 마당에 감나무의 감들도 익어가는데 어느 유행가 가사에도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간다고도 하는데 나는 왜 그냥 그럴까?


  오십 대 중반, 누군가가 다시 이십 대나 삼십 대가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난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답할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기도 어렵겠지만 걸어온 시간들은 그 나름의 모습으로 내 안에 담겨있다. 굳이 되돌아가지 않아도 내 안에 담겨있기도 하지만 지금의 여유로움이 나쁘지 않고 알고는 다시 치열해지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모르고 달려온 시간들은 끝없이 치열할 수 있었고 그 시간들을 추억하면 그 치열함이 열정 넘쳤던 것 같아서 아름답기까지 해서 그걸로 족하다.


  가난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자랐으면서도 나는 부를 쫓지 않았다. 시간 시간마다 그때의 가장 중요한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찾아 그저 성실하고 치열하게 임했었다. 가끔 부자가 되고자 발버둥 치지 않는 내가 궁금했다. 어린 시절 하고 싶었던 것들을 미리 알아서 자제하고 부모님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아무 걱정 없는 것처럼 내색하지 않고 살았던 시간들이 많았기에 부자가 되고도 싶었을 것 같은데 거기에 초점을 맞춰 살지만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절약하고 검소하게는 살았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 유난스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자에 대한 로망이랄까 뭐 그런 건 그다지 그렇지만 정말 깊고 넓은 지식을 갖아서 그걸 토양으로 따뜻한 감성을 지닌 지혜가 넘치는 사람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 엊그제 잠을 청하다 포기하고 TV를 봤다. 전직 교수 한 분과 스님 한 분이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본인들의 분야에 대해 경직된 사고를 하거나 고집하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따뜻하게 표현하는 모습을 봤다. 의 로망은 그분들처럼 되고 싶은 거다. 그런데 슬픈 현실은 나이가 먹으면 좀 더 훌륭한 인품을 갖은 깊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텅 빈 깡통 같은 나를 마주하고 있는 걸 본 것이다.


  애석한 일이다. 노화로 기능은 하나 둘 퇴화되고 특히 생각의 연속성에 문제가 생겨서 무슨 말을 하다가 잠시 쉬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하얗게 기억이 안 날 때도 있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단순한 생물학적인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책 한 권 읽기가 쉽지 않다.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그래도 최소한의 책은 읽어야 되는데 날밤을 지새우면서 읽던 책을 최근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 한 권을 극기 훈련하듯이 읽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포털이나 기웃거리고 영상으로나 뭔가를 받아들이지 진득하게 책 한 권 보기를 힘들어하니 문제 중의 문제다.


 어쩌면 나는 청년 시절에 더욱 분화된 생각을 했으며 심도 있는 철학이나 사물을 이해하는 깊이 있는 시선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현재 나는 빈껍데기뿐인 것 같다. 언젠가는 깊고 넓은 사람으로 현명하게 익어가는 날이 올 줄 알았다. 지천명, 이순, 종심이란 걸 믿었다. 데이터가 헛되지 않겠지 싶었다. 나이가 길잡이 노릇을 해줄 거라고 기대했었다. 명상 속에서 나를 읽으려는 노력도 없고 죄 없는 책과는 괜한 신경전이나 벌이면서 대면 대면하고 무엇이 나를 이렇게 황폐화시켜버렸나? 붉게 물든 노을이 하늘과 땅과 바다를 불태우듯이 언젠가는 내게도 그럴 날이 올까? 혁신적인 변화를 꿈꾸는 게 아니다. 그저 어미닭과 아기 병아리들을 포근하게 품어줄 따뜻한 햇살이기를 원한다. 나의 오늘과 내일이.

작가의 이전글 로봇 청소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