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향성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고 했다. 스트레스의 근원은 욕심이다. 사람마다 다양한 욕심이 있겠지만 나는 칭찬받고 싶은 욕심과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내 주요 욕심이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욕심도 나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는 이유였었던 걸 보면 그런 욕심도 있었다.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소처럼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보면 안 되는 것들을 봐 버리고 만다.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며 살았던 이들의 민낯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비굴한 건지 뭔지는 그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들 속에서 살기 위해서 눈과 귀를 볼륨 조절하듯 그 기능을 약하게 하고 살아낸다.
사노라면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이 있다.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버리다 보면 필요한 것도 유지되기가 힘들다. 필요 없는 게 필요 있는 걸 바쳐주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보면 안 되었던 것들도 입에 쓴 약처럼 얼마간의 성장을 이끌어 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쓰디쓴 하루치의 불행을 견디며 산다. 더 불행하지 않기 위해 참아낸다. 따지고 보면 행복하려고 하니까 불행해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기대치 즉 욕심이 힘들게 하는 주범이었던 거다.
오십 중반을 넘기면서 이제는 더 이상 누구에 의해서 나의 행, 불행이 결정되는 일들을 줄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좋은 사람, 멋진 사람 뭐 그런 평가를 받으면서 살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을 때가 됐다. 그냥 나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자가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다.
부질없는 걸 부여잡고 그게 다 인 것처럼 살 때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내가 다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목적에 충실하자.'라는 말이 있다. 내 삶의 목적은 누군가의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내가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각자 다른 시선을 갖고 있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명 보다 대자연으로부터 받은 감동이 더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 어떤 걸작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기지 못한다.
뭐 되지 않는 개똥철학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오십 중반을 넘기면서 내 삶의 방향성을 '사람'에 두기보다 자연과 친하게 지내는 삶을 살고 싶다. 하루아침에 금방 쉽게 변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람에 대한 바람, 기대치 이런 걸 하나하나 버리면서 살아보려 한다.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나의 삶을 살고자 한다. 그간 지구의 중력에 의해 직립하였고 뛰고 또 뛰었다면 이제는 굳이 이 악물고 곧게 서려고도 뛰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자연과 친하게 지내고 자연에 동화되어 나 또한 자연이 되어 있는 나이기를 바란다.
욕심의 크기가 좀 소박했던지 이 나이 먹도록 '행복'이라는 것들을 많이 느끼면서 살았다. 감사한 일이다. 세속에서의 행복의 부피를 키워 가면서 나를 더 다그치면서 그렇게는 이제 살지 말자는 말을 내게 하는 중이다. 진정한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태양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많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시선을 갖는 내가 되어보자는 것이다. 오십 중반을 넘기고서야 제대로 행복하였다고 추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