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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May 17. 2023

나는 왜, 아주 작은 것에 감동하는 걸까?

여과작용, 자정작용

  지난 일요일은 엄마가 입원 후 두 번째로 맞은 아버지 기일이었다.

딸만 낳은 우리 부모님은 걱정 중의 걱정이 돌아가시게 되면 누가 당신들의 제사를 지낼까였다.

돌아가신 지 근 사십 년이 가까운 우리 아버지는 우리 엄마께서 각별하게 챙기셨었다.

 우리 엄마는 뇌경색으로 입원하시기 직전까지 당신 끼니 챙겨드시기도 어려운 건강상태였음에도 우리 아버지뿐만 아니라 조부모님의 제사도 지내셨다.

장남의 처라는 이유로 작은아버지들이 계셨어도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시겠다고 하셨었다.

당신들께서 그처럼 중요하게 생각하셨기에 얼마간이라도 아버지의 기일을 챙겨서 제사를 지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남편과 둘이서 음식을 챙겨서 아버지 산소를 찾아 제를 지냈다.

우리 고향집 앞 동네에 산소가 있어서 제를 지낸 후 집도 둘러보고 근처에 일이 있어서 남편은 그곳에 머무르고 난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빠듯하게 차시간을 맞춰 겨우 버스를 탔는데 신호등 때문에 나는 먼저 내려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었었다. 일 이분 상간으로 겨우 버스를 탔다.

걱정할까 봐 남편에게 차 탔다는 문자를 보내려고 하는데 먼저 문자가 왔다.

"앞을 봐."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앞을 보라니?' 하며 동시에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버스 밖에 바로 남편이 서 있었다.

신호등 때문에 먼저 내려 버스정류장을 향해 달린 내가 버스를 탔나 걱정이 되어 주차해 두고 내 뒤를 따라 달렸었나 보다. 내 남편이.

이 장면에서 나는 감동이 밀려왔다. 이게 뭐라고.


  사랑은 글쎄, 누군가가 줬다기보다 내가 느껴버리는 게 더 맞지 않나 싶다.

물질로 확인되지 않는 그런 감정은 내 기준에서 느끼고 또 주고 그런 게 스스로 확인이 가능하여 무형의 감정은 내 몫인 것 같다. 다른 사람 보다 난 작은 것도 더 크게 느껴버리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감정과 이성의 비율을 볼 때 모르긴 몰라도 감정의 비율이 훨씬 더 높을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한마디로 평생을 품고 행복해하기도 하고 자부심으로 키워가기도 하면서 살았다.

하다 하다 요즘은 스스로를 인정해 줘서 그걸 에너지 삼아 살아보자는 생각까지 한 사람이 나다.

수학선생님의 한 마디, 호랑이 직장상사의 한 마디, 내 남편의 한 마디를 품고 자부심으로 키워 나가기도 하고 삶의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원래 갖은 게 없어서 그분들의 칭찬 한 마디가 큰 역할을 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적어도 내가 아는 나는 나를 인정해 주는 한 마디면 소처럼 묵묵히 무슨 일이든 해낼 사람이다.

어쩌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사람인데 왜 살면서 힘든 게 없었겠는가?

최근에도 친밀도 엄청 다고 생각하는 동료로부터 신의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한 마디를 듣고 마음 둘 곳을 잃어 힘들어하고 있다. 잊을만하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쓰나미 급으로 훑고 가버리는 상처를 받곤 한다.

강력한 오염수도 세월 속에서 자정작용에 의해 청정수로 새로 태어나듯이 나 또한 상처가 아물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알고 보면 치열하게 열심히 더 열심히 그리고 더 더 열심히 살아서 얻은 결과물은 조금 더 질 좋은 의식주일 뿐이다. 그런데 그걸 더 얻겠다고 신의를 저버리고 가까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작은 것에 쉽게 감동해 버리는 나 같은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버린다.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고 남긴 상흔은 아물 날이 언제일지 알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누군가도 또 신의를 저버리면 어쩔까 염려하면서 한 여름에도 한기를 느껴버린다.


  훌훌 털어버리고 내 곁에 있는 귀한 내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서 다시 기운을 차려보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이참에 친구가 아닌 사람을 친구로 믿고 지낸 내 우둔함을 알아차렸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바다에 이는 해일도 큰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바다를 정화시키는 순기능도 있다고 들었다.

사노라면 아픔으로 느껴지는 것도 나를 해하는 나쁜 것들을 일찍 알아차려서 물리치는 자정작용의 하나일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아픔을 겪었다고 나를 잃어버리지는 말자.

작은 것에 감동해 버리는 내가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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