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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Aug 09. 2021

모르고 지나가는 것들

  지금으로부터 족히 삼십 년 전쯤 된 일이다. 절친들 세명이 서울의 어느 여대 앞 골목에 있는 점집엘 갔었다. 그렇게 직접 점집을 찾아서 간 것은 살면서 지금까지 딱 그때 한번 있는 일이었다. 책으로 공부해서 운영하는 사주풀이 점집이라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들은 사주풀이 중 의외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다. 세명 중에서 내가 제일 정적이고 그 둘은 약간은 차이가 있지만 나하고 비교할 바가 아닐 정도로 동적인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셋 중에 유일하게 내게만 역마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영 아니다고 생각하면서 흘려들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이후 결혼을 해서 뜻하지 않게 지역을 네 곳이나 바꿔가며 살게 되면서 그때 그 점집에서 들었던 말이 맞나? 그때 또 뭐라고 했더라? 그때 들었던 좋은 말을 생각해내면서 속으로 기대를 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세 번째 살았던 집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살았던 지역이다. 그곳에서는 십 년을 살아서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그곳에서 더 살았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그곳은 우리 아이들도 고향처럼 생각하는 곳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행복했었던 삼십 대를 그곳에서 보냈다. 십 년을 살았으니 정이 말할 수 없이 들었고 가끔 그곳을 지날 때면 우리가 살았던 집과 주변들의 변화된 모습들을 꼼꼼히 챙겨보게 된다. 내 고향은 내가 태어났고 지금도 엄마가 그 집에서 살고 계시니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는데 지역을 옮겨가며 이사를 하게 되니까 그곳에서 함께 어울려 살았던 사람들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가 살았던 집에 정이 들어서 집을 떠나는 그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슬퍼서 엉엉 울기까지 했었다. 십 년을 살아서 더욱 그 집과 헤어지는 게 슬펐겠지만 그 이전의 집들과도 헤어질 때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슬펐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살았던 집들에 정이 들고 애정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그 집의 벽에 아이 셋의 성장해가는 키가 기록되어 있고 우리 가족의 희로애락이 진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정이란 건 살아 숨 쉬는 생물들끼리의 교감으로 생기게 되는 진한 울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터라 가족이 떠난 빈 공간 그곳 집에 그렇게 애틋한 정이 느껴진다는 게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살았던 집뿐만 아니라 나란 사람이 유난히 감성이 홍수를 이루곤 했던 것 같다. 노랫말이 좀 슬프면 눈물을 자제할 수 없어서 제대로 노래를 부르지 못했고 주변에 누가 울면 금세 따라 울곤 했다. 그런 까닭인지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도 넋을 잃은 듯 감동하기 바쁘다. 우리 집 마당 위의 밤하늘은 비가 오지 않는 이상 늘 아름다웠다. 빛깔부터 계절별 시간대별로 다채롭기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고 촘촘히 박혀있는 별들은 그냥 있는 법이 없다. 반짝반짝 그들끼리 소곤소곤 대화라도 하듯이 움직인다. 밤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운데 어느 새벽에 하늘을 보았다. 어쩌다 그날은 새벽 공기를 가르면서 이른 조깅을 시작했는데 뛰다 말고 우연히 하늘을 보게 되었다. 그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는 작은 도시였는데 빙 둘러 우뚝우뚝 솟아 있는 산 주변이 시간적으로 여명이 밝아오는 까닭이었겠지만 오묘하면서도 화려하고 찬란한 색깔들이란 '세상의 어느 화가가 그렇게 붓질을 할까?' 이런 생각이 절로 들게 하였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탄성을 자아내면서 가까운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현상이 일어나는데 모르고 살았구나. 그 새벽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그 후로도 가끔 그 시간에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이른 조깅을 하곤 했었다.  


  사노라면 모든 걸 다 알고 살 수는 없다. 때로는 모르고 지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알면서도 모르는 채 해줘야 할 때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노안이 되고 청력이 떨어지고 그러는 것도 속속들이 다 보고 다 듣고 그러지 말고 조금씩은 모르고 지내라고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깊은 신의 섭리를 거스르고 느낌, 다른 말로 감정은 왜 늙지 않는지? 그 또한 신의 뜻인 걸까? 나이가 들수록 스치는 바람에도 그 쓸쓸함과 스산함을 왜 그렇게 뼈 깊숙이 느끼는지? 나이 탓이 아니라 애초에 사람이면 다 그런 거일 지도 모른다. 간절히 집중할 그 무언가가 없어지고 스스로에게 시선을 돌리다 보니 뒤늦게 세세한 감정의 변화를 감지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하라 사막의 밤하늘이 아름답다고 들었다. 그 아름다움은 모르는 채 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는 꼭 그 아름다움은 찾아서 한껏 느끼고 싶다. 그리고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 앞에 부득부득 맨살을 드러내지 말자. 이제는 모르고 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도록 그냥 바라만 보는 여유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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