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스스로를 판단할 때 남달리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용기는 대체로 정의로움을 위해서 씩씩함을 발동시키는 행동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용기 있고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용기 있는 행동을 할 때마다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래하고 행동할 때가 많았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용기, 정의 그 이전의 나의 본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란 사람은 불합리함에 몹시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다. 그 불편함을 참아내지 못해서 용기를 발휘했었다. 손해? 이익? 뭐 그런 건 불합리한 상황이 생기면 별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불합리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 불합리함이 내게 불합리함인지 다른 사람에게 불합리함인지 그것도 크게 행동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내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면 불편함만 오는 게 아니라 고통이 동반한다.
쉽게 통용되는 말로 관행이라고 할만한 상황인데 그걸 단순 셈법으로 해석해서 일 년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일을 일수를 계산해서 차감하는 경우를 보았다. 계약관계에 있는 상대에게 위탁자의 사정으로 아주 적은 날을 운영하지 못했는데 그걸 수탁자의 수혜금에서 차감하는 걸 보았다. 유사한 사례의 다른 업체는 차감하거나 그러지 않는 데다가 상식선에서 해석할 때 충분히 관행에 가까운 상황인데 그걸 차감한다는 게 불합리해 보였다.
그래서 그런 불합리한 셈법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나름의 장치를 하고 절차상 그분들께 안내를 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상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다수의 수탁자들 중 아주 적은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큰 이익이 발생할 수도 있는 제도(?)를 장착시켜 뒀는데 그걸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담합을 유도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분들께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 만든 장치인데 그분들은 더 나노급으로 약간의 손해를 예상해서 못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중간에서 별 수없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분들 때문에 동종의 일을 하는 여러 사람들이 또 불합리함을 당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분명히 불합리함으로 생기는 손해가 훨씬 더 많은데 그걸 알만도 한데 당장 비교도 안될 정도의 적은 손해가 발생 안 할 수도 있고 발생할 약간의 가능성도 있는데 그걸 감수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생각해서 손해를 차단하기 위해서 마음을 썼는데 겉으로 예상되는 더 심하게 적은 손해를 감래를 못하겠다고 아우성인걸 보면서 애초에 불합리해 보이는 판을 짜서 이행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어리석음의 자유를 누가 어떻게 막겠는가? 불합리함 따위가 뭐 별거라고? 더 큰 손실이 동반한 불합리함은 의식하지 못하고 극나노급의 셈법을 발동시키는 자들에 경악하고 두 손 두 발 들고 그저 불합리함을 차단해 보겠다는 또 다른 어리석은 자, 나를 마주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불합리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소탐대실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불합리하다고 바로잡아보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하는 또 다른 어리석은 자의 공생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웃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덮을 만도 한데 그걸 셈해서 차감하는 큰 업체와 그런 상황에 불합리함을 느껴서 바로잡아서 제안했더니 발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더 적은 손해를 예측해서 더 큰 손해가 동반되는 불합리한 상황을 맞게 생긴 어리석은 자들을 보면서 기가 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방어할 수 있는 밥상을 차려줘도 눈앞의 손해가 더 크고 중하게 느껴지는 오류를 범한다. 특별한 사람들만 겪는 에피소드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유사한 사례를 겪으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여러 사람들이 있을 경우 분명히 적어도 한두 명이라도 제대로 상황파악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그냥 여러 사람들 앞에서 "다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손해, 적은 손해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그들과 한편이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버리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알고 보면 본인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데도 말이다. 결국은 중심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껍질 속에 또 껍질이 있는 양파처럼 불합리하다는 것 또한 표면적인 불합리함이 전부가 아니라 그 속에 더한 불합리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뭐든 속단은 금물이고 불합리함을 바로잡겠다는 선의가 무색해질 가능성도 있으니 더 깊이 숙고하고 행동하는 냉철함이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탐대실의 어리석음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불속이라도 뛰어들듯 불합리함을 바로잡겠다는 경솔함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삶은 늘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