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차

건강, 나

by young long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붉은 태양의 칼춤에 많은 식물들이 고사(枯死)하고 있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매해 여름이 되면 역대 가장 더웠다고 하고 겨울이 되면 또 가장 추웠다고도 한다. 누적된 기록이 어떻든 간에 현실적 체감 온도가 그러하다는 걸 부인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어찌 되었든 불볕더위란 수식어도 다 담아내기 힘들 정도의 무더위는 맞다. 연일 37도를 오르내리는 경우가 있었던가 싶다.


점심때면 정원의 식물들의 변화된 모습을 반찬삼아 식후 산책을 달콤한 차 한잔 마시듯 하곤 했다. 그러나 근 일주일이 넘도록 지열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통과하는 것 까지도 어려움을 느낄 정도라 산책은 엄두도 못 낸다. 대신 식물을 많이 기르는 부서를 찾아가서 식물들의 변화된 모습을 소재로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어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금차를 마셨다. 소금으로 양치나 가글을 하는 것도 아니고 따뜻한 물에 소금을 타서 차로 마셨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소금빵도 유행처럼 선호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따라서 먹곤 한다. 갓 구운 빵은 대부분 맛있다. 소금빵도 그중 하나다. 식으면 약간 짜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는 별 다를 게 없다고 여겨진다. 겨우 익숙해졌는데 소금차라니? 다른 말로 소금물이다. 예쁜 찻잔에 뜨거운 소금물을 소금차라고 아니할 수도 없다. 땀을 많이 흘리는 날씨에 적절한 기호음료가 아닌가 싶다. 건강을 챙기는 직원이 래몬차, 올리브오일 등을 유행처럼 공구하고 전파시키더니 매일 막걸리 150ml 마시기를 권하더니 결국 소금차까지 새롭다.


염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건강요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모든 걸 무용론처럼 허사로 만드는 건 그 누구도 아니고 내 몸이다. 몸의 힘듦을 입술이 덧나는 걸로 표출되더니 나이가 들면서 증상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코가 짓무르더니 지금은 눈테두리에 염증이 생긴 듯 떱떱하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완전히 체감하고 있다.


노화가 눈치못채게 오지 않는다. 대놓고 달려든다. 눈 주위에 알레르기현상이 나타난다. 조금 완화되고 이어서 완치되었구나를 느낄 때 눈 주위가 그 전과 확연히 다르게 쭈글쭈글해져서 복원이 안된다. 지금은 목에 온통 햇볕알레르기 현상으로 붉은 깨알만 한 게 은하수처럼 깔렸다. 연고도 발라보고 알로에도 발라봐도 차도가 없어서 얼음찜질 중이다. 그중 멀쩡한 곳이 목이었는데 주변과 발란스를 맞추려는 듯 노화를 위한 작업 중인듯하다. 노화의 신이 대놓고 단계별로 접근 중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염증을 막으려고 좋다는 걸 이것저것 해보면 무엇하겠는가, 비웃기라도 하듯 정면으로 덮치는데 비책이 있겠는가, 안타깝다. 노화든 염증이든 그건 신체의 변화라고 굳이 구분해 보자. 그전에 거울을 보며 "너, 왜 그러니?"를 한 번 했다. 나이 오십이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곧 앞자리가 바뀔 시기이지만 책임이고 뭐고 내가 나를 못 알아보게 생겼다. 뭘 얼마나 잘살아보려고 발악을 했을까? 타고난 밑천은 열악했어도 표정, 인상 하나 그거라도 그나마 살아 있었는데 스스로 "누구십니까?" 하게 생겼다.


미련한 건지 뭔지 날마다 옆으로만 성장하고 온갖 노화현상이 일어나는데 근거 없는 자신감은 또 뭔지, 언젠가는 인상만큼은 돌아올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시계를 거꾸로 돌릴 자신도 없고 겉모습으로는 내가 나를 못 알아볼 정도의 속도로 노화되더라도 인상만큼은 되찾고 싶다. 여전히 먼동이 트거나 일몰을 보고 감동하고 팔랑거리는 초록잎 사이를 널뛰는 햇살에 눈부셔하며 윤슬에 황홀해하는 나이기에 언젠가는 그 모든 것들에 의해 나의 표정은 살아날 것이다.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주길 기대하는 욕심과 주변이 잘되길 바라는 걱정을 내려놓는 노력도 겸하면 더 빠른 시간에 '나'를 되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