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삶
침묵은 금이라는데 침묵이 동조의 의미로 읽히곤 하여 그 등살에 죽음을 선택하는 사례까지 생긴다. 언론이 특정인을 지목하여 꾸준히 반복적으로 공격하면 진의 여부를 설명할 기회를 잃게 된다. 죽고 난 뒤 뒤늦게 죽은 자의 진 면모를 알고 추모하고 그 이상으로 추앙하는 경우까지 생기곤 한다.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언론에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뒤늦게 무슨 염치로 추모하거나 추앙할 수 있을까? 되돌아보면 남얘기가 아니다. 그것까지 남얘기인양 침묵했을 뿐일 것이다.
침묵의 날이 그렇게 무섭다. 누군가가 사냥감이 되면 우선 납작 엎드린다. 꿈틀 하면 함께 사냥감이 될까 봐 우선 엎드리고 보는 게 상수라고 생각한다. 죽은 이는 때리는 소수보다 침묵하는 다수에게 호소할 길이 없어서 진정한 침묵인 죽음으로 응수했을 것이다. 사후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은 그래도 죽어서라도 죽은 이를 기리고 추모한다면 그나마 다행일 수도 있다.
정작 나쁜 놈들은 수명이 길다. 미인 박명이라고 했다. 미인이 외모만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품이 어질고 선량하면 그 또한 내면이 미인이라고 할만하다. 살아남아서 세상을 정화시킬만한 사람은 쉬이 꺾인다. 모든 사람이 등질 때 손잡아주고 뜨신 밥 한 끼 함께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정한 사람이다.
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 원거리를 출퇴근하는데 직장엘 가는 이유일 정도의 같은 직군 사람들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유일하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식사 후 티타임을 갖으며 서로 사담을 하거나 농담을 하는 시간이 꿀맛이었다. 그렇게 그 시간은 힘든 직장생활의 꽃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시샘하듯 우리 모두의 상사이기도 하지만 그분과 같은 직군의 다른 또 한 사람이 같은 사무실을 썼다. 그 상사가 우리 둘이 번갈아가면서 식사를 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참담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상사보다 같은 직군의 사람들이 더 무서운 사람들이 되어가는 과정을 참담한 심정으로 마주했었던 일이 있었다.
둘 이상이 모이면 참 별별 일들이 다 있다. 살아남기 위해 침묵을 택할 때도 있었고 살아가는 이유일 정도의 사람들이 그들의 생존법으로 침묵해 버리는 모습도 마주했을 때도 있었다. 침묵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위력을 뽐낸다.
사노라면 투명하게 다 말하고 사는 편인 사람인 사람까지도 몇몇 일들은 도저히 입 밖으로 다시 꺼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같은 강도로 다가오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거나 나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다시 아프게 할 것만 같은 걱정 때문에 침묵이라는 카드를 묵직하게 꺼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꺼내는 용기를 갖는다면 아마도 그 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고 싶은 절실함의 발로일 것이다.
죽음을 택하기 전에 해명이든 변명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최소한 자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사에 진실되어야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타인으로 인해 죽는 것 같지만 스스로가 이유일 경우가 더 많을 것 같다. 타인이 공격하는 그 부분이 진실이라 그걸 인정하고 사과하는 용기도 없는 경우 감당이 안 돼서 죽을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인정하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서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 침묵을 깰 수 있는 용기 있는 방법이 뭘까? 평소엔 욕쟁이 할멈 같았으나 가장 가까운 자식에게 정작 목소리를 낼 땐 겁쟁이처럼 삼켜버리고 참아버렸던 엄마가 생각난다. 얼마 전 타 부서 상사의 불합리한 행동에 침묵이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켜버린 내 모습이 연이어 생각난다. 용기 있을 땐 총 맞을 것 그거 별거 아니라고 덤비는 우리 엄마의 모습이 계산 없이 덤비는 내게도 있다.
기상 이변급의 고온 후 목숨까지 앗아간 폭우성 장마 그리고 열사의 땅 같더니 최단시간의 호우주의보. 침묵 그거 요즘 날씨 같다. 세상이 어떠하든 각자 스스로는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