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2035년 12월 20일 우리 엄마 생신이다. 2025년 2월 25일 우리 엄마는 생을 마치셨다.
2021년 11월 27일 코로나19 4차 접종을 마치고 그 뒷날 2021년 11월 28일 뇌경색으로 3년 3개월 투병하시다 별세하셨다.
사람이 10대 20대 30대 그 얼굴이 달라지듯이 우리 엄마 투병기간의 모습도 많이 변화했다. 주무시고 계시는 중엔 가끔 가슴에 귀를 대본적도 있었다. 운명하기 직전엔 말씀도 못하신 상태인데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던지 "으~" 소리를 내셨다. 산소호흡기를 낀 상태로 말할 수 없는 거친 호흡,,,,,.
동생이 마지막이 될 수 있으니 한 마디 하라고 했다. "엄마, 고생 많으셨어요. 엄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건 다 엄마 덕분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반쯤 뜬 흐릿하기만 했던 엄마의 오른쪽 눈에 촉촉이 이슬이 맺혔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 고통 속에서도 엄마는 나의 목소리를 느끼고 계셨다.
그 후 냉동고에 계시던 엄마를 둘째 언니와 함께 뵀다. 언니는 엄마를 뵙자 눈물과 함께 얼굴을 맞대고 만지고 하였다. 나는 안도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계셨던 엄마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고통의 강도가 강했기에 고통의 끝이 어디인가를 생각했었다.
상중 어느 이른 아침에 동생과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내가 고등학생 때, 그러니까 일곱 살 어린 동생은 초등학생이었는데 큰 사진틀만 한 액자에 상장이 들어있었는데 그걸 들고 부엌 쪽에서 안방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엄마, 아버지 얼굴이 환해지면서 행복해하신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동생이 말했다. "언니가 상장을 받아올 때마다 부모님은 그렇게 행복해하셨고 자랑스러워하셨다."라고 말했다.
내가 집을 떠나기 전 동생과 함께 아버지 산소를 찾았는데 그때 아버지 산소에 큰 비석을 세워드리겠다고 했다고 동생은 그 말을 듣고 언니는 다르구나 큰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랬다. 나는 아들 없다고 서럽게 생각하셨던 우리 아버지의 서러움을 그렇게라도 달래 드리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걸 실천하지 못했다.
또 실천하지 못한 게 있다. 누군가는 무엇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했다. 나는 우리 엄마 호강시켜 드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다. 결혼 전에는 실제로 별 보며 달 보며 엄마 얼굴을 떠올렸고 때론 엄마가 그리워서 베개를 적시곤 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의지할 곳 없어서 내 손을 붙잡고 곁에 있어달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때 집에 지붕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나는 충분히 엄마의 마음을 이해했었다. 그러고도 등을 보이며 집을 떠났었다.
우리 엄마는 못난 셋째인 나를 각별히 사랑하셨고 또 엄청나게 의지하셨다. 결혼하고 멀지 않은 거리에 살게 되었는데 그 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했었다. 그런데 엄마는 너무나 낙담하셔서 아파버렸다. 형광등이 깜박거린다고 교체해야 될 것 같다고도 내게 전화를 하셨고 관공서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냐고도 말씀하셨다. 우리 큰애가 말했었다. "할머니는 작은 이모와 함께 사시는데 매번 왜, 엄마에게 전화하시죠?"라고.
나는 늘 다정하고 친절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엄마의 질문에 응답했었다. 혹시 놓치는 부분이 있으면 엄마에게 더 좋은 선택을 위해 방법을 알려드리기도 했었다. 그런 셋째인 내가 내가 낳은 아이 셋이 학령기가 되자 온 마음을 아이들에게 쏟고 엄마를 살피지 못했다. 자매들은 비난했었다. 엄마가 제일 사랑하는 네가 그렇게 드물게 찾아뵈면 되느냐고. 그럼에도 한결같이 엄마는 늘 나를 걱정하시고 사랑을 쏟으셨다.
그런 엄마가 돌아가셨다. 90을 넘기고 돌아가셨다. 슬며시 눈가가 촉촉해진다. 40년이 된 아버지 산소를 개장해서 엄마와 함께 모셨다. 두 분은 서로 사랑하셨다. 어린 우리 딸들의 눈엔 늘 소리가 나고 싸우신 것 같이 보였지만 철이 들고 돌이켜 두 분의 모습을 떠올리면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셨다. 엄마는 병약한 아버지를 위해 작은방 가마솥에 늘 보양식을 끓이고 계셨고, 아버지는 글쎄? 그래도 어쨌든 사랑하셨다.
엄마가 병원에 계시기 시작할 때부터 친정이 없어졌다. 빈집만 덩그러니 그저 멀쩡한지만 점검하곤 했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40년간 한결같이 찾아뵈었던 아버지 산소도 사라졌다. 부여잡고 싶은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엄마는 나의 진정한 고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고향을 마음으로 떠올리고 또 떠올리고 살아야 한다. 제대로 호강 한 번 못 시켜드려서 죄송하다.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죄송하다. 그러나 사랑하고 존경한다. "엄마, 사랑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영혼이라도 편히 잠드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