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운 사람
어느 여름 온 가족이 설악산행을 했었다. 미혼시절 친구와 단둘이 설악산 대청봉 정상까지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그럴 일인가 싶지만 그땐 그런 별난 생각도 했으니 숨길수도 없다. 산행이 너무나 힘들었기에 배우자는 적어도 설악산 대청봉 정상은 다녀온 사람이었으면 했었다. 여러모로 아이들이 한 번쯤 그곳엘 갔다 왔으면 해서 계획한 일이었다.
설악산 등산로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었다. 등지게로 짐을 나르는 분을 만났다. 아무 짐도 없이 산을 오르는 일만으로도 계속 갈 수 있을지 중도에 하산할 건지 고민하는 참에 평지에서도 한 발짝도 옮기기 힘들 것 같은 짐을 짊어진 그분의 모습을 보고 '저분이야말로 수행하시는 수도자구나!' 깊은 산속 암자에서 수행하는 수도승보다 더한 수행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드는 생각이 내가 사는 모습이 전업 수도자는 아닐지라도 계속해서 수행자의 모습으로 살라고 주문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해 보여서 마음 주고 살려고 하는데 불쑥불쑥 사람 아닌 본모습을 보여 놀라서 정신을 잃게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아닌자들의 특징은 평범할 땐 엄청 평범하다가 사람인 줄 착각하게 해 놓고 간헐적으로 본색을 보이는 게 특징이다.
그때마다 엄청 배부르게 나이 먹어서 참 사람 보는 눈이 지질히도 없다는 자책을 한다. 단순하기가 하늘을 찌르고 남들도 본인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아주 쉽게 해 버린다. 삼십 년 전 우리 남편은 고속버스 속에서 가짜시계를 사 온 적이 있었다. 그 차속에서 가장 속아 넘어갈 것 같은 사람을 목표물로 삼아서 상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속은 거였다. 그땐 절대 난 그럴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후 삼십 년이 지났는데도 사람 볼 줄 모르는 내게 난 절망하고 있다.
하물며 같은 사람에게 반복해서 겪는다. 어떨 땐 이러저러해서 참 많이 힘들었었다고 대놓고 말해보기도 여러 번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실거리고 살았다. 이 근래에는 식물 기르는 걸 좋아해서 작은 풀뿌리 같은 걸 얻어왔다고 요즘 내가 많이 힘들어 보인다고 그걸 내게 줬다. 누가 봐도 진짜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그렇게 힘든 내게 그녀는 치명적인 사람 아닌 모습을 보였다. 눈치는 있는지 하루 종일 내 눈치를 살폈다. 수없이 많이 기절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싶어서 꿀꺽 삼켜보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어제 일로는 지금까지 꾹 참고 그 사람이 한 짓을 당사자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일만 하고 왔다.
교통사고는 아무리 자신이 조심해도 덤벼들면 당하고 만다. 내가 딱 그 꼴이다.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내게 자기 일을 내 일이라고 떠밀어서 그걸 회의에 부쳐서 기겁하게 하질 않나. 미우나 고우나 어쩔 수 없어서 잘살아보려고 애써보기도 하고 '저것도 사람인가?'싶은 행동을 해도 '아이고, 오늘도 뭘 밟았구나!' 하며 넘겨도 보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무 당하고 보니 이젠 감당하기 힘든 걸까? 하도 예측불허의 일들이 일어나니 '이건 사주팔자상 마음고생하게 생겨먹은 거 아닌가?!'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까지 하게 된다.
주말엔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염없이 산을 달린다. 그러다 산기슭에 있는 작은 텃밭엘 들른다. 텃밭에 남은 식물들이 강추위에 얼었다 대낮에는 녹았다를 반복한다. 그 모습을 보며 딱 내 신세가 저 여린 식물 꼴이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서 사람에 치여 살다가 종국에는 귀농하거나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면서 '그래도 네가 사람 보다 백번 낫구나!'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랬었다. "사람은 상대적인 거다."라고. 몹쓸 사람 투성이인 세상에서 죽을 만큼 힘들다고 살려달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네가 그 모양이니 널 상대하는 사람도 그런 거 아닌 거냐고 말하는 거라고 들어서 한 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뉴스에 차가 갑자기 돌진해서 몇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고 나온다. 그런 경우도 세상사에는 있는데 상대적인 거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요즘 세상사 얘기할 겨를이 없다. 답이 없어서 팔자타령까지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가장 위로가 되는 건 이 모든 것이 무한하지 않고 유한하다는 것이다.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그만두기도 뭐 한데 정말 다행이다. 그 후는 그때 가서 생각하고 약이 없는 차에 그렇게라도 위안 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