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long Sep 10. 2021

이 또한 지나가리니

재수, 큰아이

  세상에서 가장 큰 벌은 아픈 자식을 돌봐야 하는 부모 입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어느 부모든 본인이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할 것 같다. 그런 상황과는 좀 많이 다르지만 기나긴 시간을 그 한 곳을 향해 전심전력을 다해 달렸는데 그 관문 앞에서 낙마하는 것은 피 흘리며 다친 외상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상황을 맞았다. 대학 입시에서 탈락했다. 우리 큰아이가. 지금은 졸업하여 취업까지 한 상황이라 이렇게 글로 옮길 수가 있을 정도로 평상심을 회복한 상태이지만 그때는 실어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 말도 못 했다.


  우리 큰아이는 딸이다. 어려서는 곱게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도 처음 본 사람들은 아들이라고 했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어나서 성장하기까지 온통 내 모든 것을 지배했었던 것 같다. 첫아이는 엄마와 자식 사이에서의 첫사랑이다. 매사 처음이라 많이 서툴지만 그 어떤 때보다 초집중인 상태였다. 적어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는 그랬다.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집 밖을 나가있었던 모든 시간들의 일들을 집에 돌아오면 빠짐없이 엄마인 나에게 들려주는 명랑하고 다정다감한 아이였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즉시 "네, 엄마!" 이렇게 대답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랬었다. 그런 딸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모든 면에서 의욕적이었고 에너지가 넘쳤었다. 모든 걸 다 하려고 해서 "너무 많은 걸 해서 힘들 텐데 이건 안 하면 안 될까?"그러면 "아니에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그러면서 또 하고 또 하고 그런 아이였다. 참 의욕적이며 다재다능한 아이였다.


  그렇게 열심히 했고 또 잘했던 우리 큰아이가 대학 입시 관문 앞에서 떨어졌다. 대학을 진학하기 전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있을 텐데 '탈락'이란 예상지는 단 한 번도 생각 못했었다. 그다음 해에 입시 제도가 많이 바뀐다는 이유로 모두 안전 지원한 데다가 전년도에는 첫날 합격했을법한 예비후보 번호가 열흘째 바로 앞번호까지 합격하고 추가 합격이 끝까지 안 됐었다. 어떤 학교는 합격했었는데 포기했다. 더 가고 싶은 학교가 전년도 사례로는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예비 번호라 금세 합격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후 은행시간이 마감될 정도에 연락이 오기 때문에 그 시간이 가까워지면 심장 뛰는 소리가 밖으로 엄청 크게 들리곤 했다. 설날 즈음이었었는데 초상집 저리 가라였다. 초상집은 우는 소리라도 났겠지만 그때 우리 집은 진한 침묵만으로 가득 찼었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았던 마음은 그럴만하지만 그렇게까지 낙담하고 비참하기까지 해야 될 일이었나 싶다. 그러나 그때는 사방이 까만 커튼으로 막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까만 커튼이 열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몸과 마음이 숯덩이가 된 것 같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친지, 친구들과도 연락을 안 하고 살았었다. 참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도 절절히 체감했었다. 나 혼자 몸서리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당사자는 묵묵히 고군분투하고 있었는지 유월 모의고사에서 올 일 등급이라고 했다. 그 결과에 조금씩 전신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희망을 갖게 되면서 음식 맛을 느끼기 시작했었다.


  재수를 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본인은 그날부터 공부를 시작했었다. 혈액형이 달라서인지 엄마보다 강인한 건지 그냥 저 할 일을 했다. 가족들은 다 밖으로 나가서 생활하는데 혼자 집에서 공부를 했다. 마치 절친도 재수하느라고 학원을 다닌다기에 그 친구랑 같이 학원을 다니라고 권했다. 공부도 공부지만 하루 종일 아무하고도 말 한 자리 안 하고 어떻게 날마다 살겠냐고 강력하게 학원을 권유했었다. 결론은 본인 스케줄대로 혼자 필요한 부분은 EBS 보면서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곰이 마늘만 먹고 지내듯이 뜻하지 않게 스스로 갇혀 사는 동굴생활을 했다.


  유월 모의고사 결과로 많이 느슨해졌던지 9월 모의고사 결과가 비상 수준이었다. 아마도 재수생도 합류하고 하여 더 정신 차려야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 같았다. 본인이 생산한 결과가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없앴다. 다시 말하자면 엄마의 개입이 가능해졌다. 대형 달력 뒷면에 도표를 그려서 과목별로 매일 공부한 내역을 기록하도록 했고 점수가 낮아진 수학을 집중해서 10년 치 평가원 모의고사를 매일 한 회분을 풀고 그전날 오답을 다시 풀기를 5일씩 끊어서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점검하면서 수능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공부를 했다. 결과는 적어도 수학은 채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했었던 결과였다.


  수능 후 합격자 발표일에 두 학교에 합격하게 되었다. 그 까맣고 막막한 재수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서울에 사람들이 선하는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하였고 다른 학교는 졸업 후 라이선스를 취득할 수 있는 학교엘 합격했었다. 제한된 시간에 많은 고민과 은사님과의 상담 등을 면서 어느 학교에 진학할지 결정했었다. 참 우여곡절 속에 대학 학이라는 대단원이 마무리되었다. 지금 마치 수시 원서를 쓰는 시기라 그 한가운데 있는 학생, 학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엄마가 되어 참 많은 경험을 했다. 한편으로는 그 모든 과정을 졸업하게 된 현재가 너무도 다행스럽고 좋다. 누구든 좌초될 것 같은 풍랑을 만나고 그 힘든 과정을 극복하게 된다. 영원히 멈춰버릴 것만 같던 그 느리고 묵직한 시간은 그래도 간다. 부디 힘내시길.



작가의 이전글 좀 다른 직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