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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Oct 14. 2021

아름다운 거리두기

관계

  생각해보면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인간이다. 머리카락 머리 뇌 눈 코 입 귀 몸통 팔다리 손 발 장기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게 없다. 기능이나 용도가 어떻게 그렇게 절묘한지 생각할수록 신비하다. 그렇게 갖출 것 다 갖춘 한 인간이 스치는 바람에도 감정이 나뭇가지 흔들리듯 흔들린다. 한 인간의 세포가 60조 개에 달한다고 하더니 감정의 변화도 세포수에 비례하게 다채롭다. 나 혼자만으로도 조석으로 계절별로 감정이 물결을 치는데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는 어떻겠는가? 남편 자식 부모 형제 친구 직장동료 이름 짓기 모호한 수많은 지인들 등 그들과 날마다 희로애락의 달콤 쌉싸름한 드라마를 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진한 감정의 정점을 맛보면서 산다. 가깝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한마디가 사는데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든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적으로는 생각뿐이고 사람이니까 물질적인 보답은 아니더라도 정서적인 온기 같은 거라도 뭔가 바라는 게 현실인 거 같다. 긴 시간 동안 엄청 위하고 살았던 이가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언행을 할 경우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어떻게 네가 나한테?'이런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서로 알게 모르게 바라는 바가 있게 마련인 것 같다.


  누군가와의 관계든지 어떤 한 사람의 희생으로 관계가 유지되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이니까 영원히 일방적으로 희생을 자초하기가 힘들다. 심리적인 보상 없이 계속적인 희생은 스스로를 병들게 한다. 고마움도 모르고 당연하게만 생각하면서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은 끝내 상대를 아프게 한다. 묘하기도 하고 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누리는 사람은 계속 누리고 희생하는 사람은 희생이 아니라고 하면서까지 계속 희생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 상처 받기 전에 일찍 정신을 차려야 한다. 서로를 위해서 건강한 관계 유지가 필요하다.


  참 어리석고 기가 막힌 일이지만 보통의 경우 본인에게 늘 잘해주는 사람에게 무신경하고 때로는 무례하기까지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본인에게 대면 대면하기까지 한 사람에게는 반대로 깍듯한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사위는 백년손님으로 대접하고 며느리는 무수리처럼 대하는 경우가 그런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형제간들끼리도 같은 혈육끼리 있을 때는 서로에게 예를 갖추지 않다가도 서로의 배우자들이나 그런 사람들과 동행할 경우는 상당히 예를 갖추곤 한다. 씁쓸한 일이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누구와의 관계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어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사회적 거리두기'란 현실 때문에 '거리두기'라는 말 자체가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거리두기'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거리를 말하고 싶은 거다. 남편이든 부인이든 부모든 자식이든 친구든 그 누구든 간에 서로 '아름다운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거리두기'는 다른 말로 '존중', '배려', '예의'가 아닌가 싶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언제 어느 때나 그런 마음을 갖추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 더 언급하자면 '나와 나' 사이에도 '존중'이라는 아름다운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습관적으로 상대에게 존중과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경우에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배제시킬 경우가 허다하다. 바램이면서 더 아름다운 모습은 상대도 나를 존중하고 배려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세상이 아름답게만 펼쳐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나를 존중하는 모습을 내가 갖출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거리두기'는 서로 상처 받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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