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보다

17. 무형의 재산

by 바보

핸드폰을 바짝 갖다 대고 사진을 찍는데도 꿈쩍 않고 찌르르 소리를 냈다. 길가 풀숲에서 발견한 여치 한 마리가 나를 지난 시간으로 들어서게 했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었던 예쁜 여치 집이 생각났다. 그 안에 들어있는 여치가 노래하기를 기다리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었다. 여치에게는 못 할 짓이었지만 그때는 마냥 기쁘고 신기하기만 했다. 며칠 전 새벽에는 맹꽁이가 요란하게 울어대는 바람에 놀라서 잠에서 깨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리둥절하다가 맹꽁이라는 걸 알았다. 맹꽁이야? 맹꽁이라니! 어린 시절 듣고 그 뒤로 맹꽁이 소리는 처음이었다. 이름 그대로 맹, 하는 외침에 이어 꽁, 하고 마무리하는 재미있는 소리에 하하 웃다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집 주변에 지천으로 뛰어다니던 여치와 메뚜기, 방아깨비, 맹꽁이와 개구리 그리고 두꺼비와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풍요로웠다.

식량이 부족해서 마을 사람들은 굶기도 하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잔반으로 끓인 멀건 꿀꿀이죽을 먹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미국 구호물자인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죽과 빵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입을 옷이 없어서 여기저기 덧대서 기운 자리가 다시 해지고 구멍 난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도 많았다. 여름에 겨울옷을 팔을 떼어 입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미군들이 싣고 온 푸르죽죽한 셔츠를 입고 운동장에서 미군들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때 그곳의 시간과 장소를 지금 여기로 데려온다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진귀한 물건들이 넘쳐나는 신세계가 도래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좋은 것 뒤에 따르는 검은 그림자처럼, 물질적 풍요를 얻은 대신 잃은 것들이 있다. 그 시절 마을은 대문이 없고 이웃도 식구처럼 지내는 열린 세계였다. 동네 언니, 오빠들과 동생들과 무한히 뛰어놀 수 있는 들판과 산과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는 이웃이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들판이 사라지고, 아파트들이 그 자리를 막아섰다. 머지않아 이 동네 여치와 맹꽁이도 아파트에 밀려서 서식지를 잃게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은 굶거나 구멍 난 옷을 입을 염려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우리 반 경이 어머니가 교실 환경정리를 도맡아 했다. 경이 어머니는 내가 보아온 어머니들과 달랐다. 얼굴이 하얗고 말씨도 곱고 표정도 다정하고 상냥했다. 선생님이 교실 뒤편에 걸린 예쁜 액자 속 그림이 경이 어머니 작품이라며, 경이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박수를 보내자고 했을 때, 나는 경이가 부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우리 어머니들은 종일 집안일에 시달려 얼굴과 손이 거칠고 입도 험했다. 어머니들은 아기를 업고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거나 김칫거리를 씻으며 수다를 떨었다. 우리가 재미있게 놀이를 하고 있는 곳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그만 놀고 들어와서 밥을 먹으라고 악을 쓰기도 했다. 집집이 아이들이 들끓었고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나무라는 욕설 섞인 고성이 마을에 가득했다. 우리 어머니는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집안일에 치어서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자녀에게 미소를 짓고 살갑게 대화를 나누고 그림을 그리는 경이 어머니 같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경이 아버지도 가끔 학교를 방문했는데 우리 아버지들과 달랐다. 경이 아버지는 자녀와 놀아주고 자녀를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동화책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 모습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따뜻하게 자식을 대했지만 내가 기대하는 신식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버지와 서울 남산으로 케이블카를 타러 갔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말없이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느라 총총걸음을 해야 했다. 남산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요즘 같은 고층 건물은 아니지만 높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서 퍽 놀랐다. 그때 나는 참 고독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에게 내 기분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생각이나 기분을 물은 적이 없었고, 나 역시 내 견해나 감정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표현한 적이 없었다. 새로 산 예쁜 원피스를 입고 아버지와 창경원에 간 적이 있었다. 창경원에 관람객이 얼마나 많은지 동물 우리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왜 구경꾼들을 비집고 들어가지 않았는지, 왜 나는 동물이 안 보인다고 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힘들게 뙤약볕을 걸어 다니며 내가 본 것은 사람들의 까만 머리와 코끼리의 회색 등뿐이었다. 중학교 때 우리 반 아이가 아버지와 테니스를 친다고 했을 때 나는 그 아이가 나와 다른 차원의 아버지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마냥 철부지는 아니어서 우리 부모님이 최선을 다해서 자식을 키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부모는 아니었으므로 그런 부모를 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내가 불만족스러웠던 것 중에는 지역에 관한 것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서울 화신백화점을 다녀왔다고 자랑할 때도 나는 서울에 특별함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에 갔을 때 서울이라는 도시가 주는 무게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어쩐지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듯한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때로는 서울이라는 공간이 나를 거부하는 듯한 두려움에 잠기기도 했다. 주위에 경기여고와 이화여고 출신들이 많았는데 그 아이들에게는 내가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내가 놓쳐버렸기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그 아이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부러웠고 미국인들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영화를 보면 미국 백화점에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집집이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었다. 냉장고 문 쪽에 달걀과 우유팩과 음료수들이 가득한 영화 속 장면에 감탄했다. 대학 교수를 때려치우고 미국에 가서 생선을 토막 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살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삼는 시기에 젊은 날을 보냈다. 나도 미국에 갈 수 있을까 싶어 토플 책을 사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나를 움츠러들게 하고 때로 겁에 질리게 했던 것들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경이와는 4학년에 올라가서도 같은 반이 되었다. 경이네 양옥집으로 놀러 갔을 때 마루에 있던 소파를 나는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게 소파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학교 시험에서는 내가 경이보다 높은 점수를 받고 있었지만 경이는 질적으로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방학에 미국에 있는 이모네 집에 갈 거야. 나는 삼촌 만나러 파리에 갈 건데. 외국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에 대학 동기들이 나누던 대화에서도 나는 소외감과 결핍을 느꼈다. 그들은 내가 접근할 수 없는 다른 계급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상류층이 누릴 것으로 예상되는 삶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거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외에,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고 숫자로 측정될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지닌 기품과 여유, 자신감, 행복감, 자유로움 같은 것들은 내가 단기간에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우리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아직 우리 도시에 백화점과 대형 서점이 없었다. 나는 아이가 꼬마였을 때부터 서울에 있는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서 장난감 구경을 시켜 주었다. 그때는 백화점에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한참을 놀게 하다가 아이가 원하는 장난감을 몇 개 사 가지고 돌아왔다. 조금 자라서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오래 머물렀다. 얼마 전,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가, 어디에 가서도 기죽지 않게 잘 키워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내게 했다. 내가 일찍부터 아이에게 형체 없는 재산을 주고 싶었다는 것을 아이가 알아챈 것 같아 고마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부러워하고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들이 별거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심각한 결함으로 여겨서 박탈감과 열등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바람에 경이네 집에 있던 소파가 지금은 집집이 다 있고, 대학 동기들의 외국 나들이도, 미국인들의 냉장고와 승용차도 누구나 가까이 누리고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상류계층의 삶도 내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김치를 담가주었던 어머니와 김치통을 우리 집으로 날랐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소소하게나마 경제적 여유와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이 가장 큰 재산이었다는 것을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점점 더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대자연 속에서 뛰어놀 수 있었던 것도 큰 축복이고 선물이었다. 그 들판과 산과 바닷가를 함께 누볐던 무수한 생명체와 동무들과의 추억이 내 인생에 축적된 커다란 재산이었다. 한때 서울이나 미국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거주지가 아닌 다른 지역일 뿐, 그곳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위축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혼잡스러운 서울보다는 줄곧 살아온 우리 도시의 바다 냄새와 익숙한 것들을 좋아하고, 남의 나라 미국보다는 내 나라에서 편안히 살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눈과 숫자로 측량할 수 없는 무수한 종류의 재산이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드니까 깨닫게 된다. 결핍 환자처럼 헐떡이던 마음이 쉬어지고,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소중한 재산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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