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판단 보류
어린 시절 우리들의 원수는 김일성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어머니에게는 잔악한 일본 놈들이 원수였는데, 피난민이었던 아버지에게는 일본 놈도 김일성도 원수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원수는 없는 것 같았다. ‘때려잡자 김일성’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구호에 맞춰 내가 반공 포스터 그리기 숙제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왜 남이 죽기를 바라느냐,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는데 아버지의 표정이 어두웠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시절 나에게는 공인된 김일성보다 더 큰 원수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고향 친구 아들이었다. 시내에서 살았던 아저씨는 교외에 있던 우리 집에 자주 왕래했다. 아저씨는 부부 동반으로 우리 집을 방문할 때도 있었고, 나와 동갑인 아들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들판이며 산과 바다로 뛰어다니느라 온통 새까맣고 지저분했던 나와 달리 그 아이는 도시 아이여서 얼굴도 하얗고 옷차림도 세련되고 깔끔했다. 그 아이를 보면 공연히 주눅이 들었다. 아저씨가 그 아이를 대동할 때는 둘을 앉혀 놓고 암산 시합을 벌였다. 아저씨가 숫자를 부르면 첫 두 개의 숫자를 계산하고 있는 사이에 줄줄이 숫자가 이어져 나와서 나는 이내 암산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 많은 숫자 더미에 짓눌리지 않고 잘도 헤쳐 나갔다. 그러면 아저씨는 의기양양해서 자기 아들이 무슨 상을 탔느니 반장으로 선출되었느니 하면서 아들 자랑을 늘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겨울은 매우 추워서 집 밖으로 나가기 쉽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방 안에 놓아둔 물그릇이 밤새 꽝꽝 얼어붙고, 유리창에는 성에가 두껍게 끼어 있었다. 햇살이 퍼지지 않은 오전에는 꼼짝없이 아랫목 이불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마당이 넓은 남향집이라서 방안 깊숙이 해가 들어와서 오후에는 차가운 윗목에서도 놀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동생들과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저런 딸들을 길러서 뭐 하나. 시집보내 남 주면 그만인데.” 언제 왔는지 아저씨 부부가 방문을 열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주머니가 쯧쯧 혀를 차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베개를 업고 있던 나는 유치한 내 모습을 들킨 게 무안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마음에 쌓인 게 있어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들었다. “아줌마, 그 아들 자랑 좀 그만하세요. 이다음에 아줌마네 아들이 잘되나 우리 집 딸들이 잘되나 어디 두고 보시자고요.” 악을 쓰고는 면전에서 방문을 꽝하고 닫아 버렸다.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꾸중을 하고, 나는 고함을 지르고 동생들은 울었다. 그 뒤로 그 아주머니와 아들은 우리 집에 발길을 끊었는데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집에 와서 아들 자랑을 했다. 나는 그 아이를 이겨야 했다. 그 아이의 존재가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혔다. 그 아이만 없으면 사는 게 편할 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할 때 그 아이 때문에 공부가 몇 배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 아이만 시험에 합격하고 나는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근심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입학시험을 보러 갔을 때 지우개 앞뒤로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언니 꼭 붙어. 동철이를 꼭 이겨야 해. 우리가 꼭 승리해야 해. 꼭. 꼭. 꼭.” 동생의 응원 글이었다. 감독 선생님이 커닝 자료로 오해할까 봐 가슴 졸이며 칼로 지우개 표면을 깎아냈다. 그 아이를 떨칠 수 있다면 생의 무게가 가벼워질 거라는 생각을 그 순간에도 했다. 그 아이의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동생들이 만세를 불렀다. 나 역시 그 아이가 떨어진 게 내가 합격한 것보다 기뻤다. 중학생이 되어 그럭저럭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 아주머니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머리에는 해진 수건을 쓰고 기다란 행주치마를 두른 우리 어머니 앞에서 아주머니는 “우리 아들이 이번에 장학금을 타서 해 준 거라고요.” 옷 자랑을 하면서 내가 몇 등이나 하는지 물었다. “우리 아들은 지난해 일등을 했는데.” 그까짓 이류 학교에서 일등을 한 게 뭐 대단한가 싶었지만 아주머니 앞에서 풀죽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일류 중학교에 다닌다고 그 아이에 대해 잠시 무방비 상태로 지내고 있었던 게 큰 잘못이었다. 그 아이는 또다시 나를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했고, 그 아이로부터 받은 중압감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즈음 인생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쓸데없는 인생철학을 접고 다시 점수 벌레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 입시를 치를 때 아저씨는 아들의 서울대학 지원을 자랑하러 왔다. 아들이 최고 대학에 다닌다고 으스대는 걸 지켜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대입에서 그 아이는 다시 실패를 하고 후기 대학에 진학했다. “우리 아들은 실력은 좋은데 입시 운이 따르지 않는 거라고.” 아저씨는 여전히 큰소리를 쳤고, 우리 부모님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저씨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주머니 역시 아들의 낙방에도 당당했다. 그들의 우월감은 영원히 누그러지지 않을 것 같았고, 우리 부모님은 그들 앞에서 언제나 열등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시간부터 그 아이는 내 인생에서 물러났고, 나는 그 아이로부터 벗어났다. 우리는 서로 소식을 모른 채 지내고 있다. 어디선가 잘살고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아이와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우리 가족을 압박하고, 내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어둡게 만들었지만, 우리 형제들을 부지런히 달리게 한 좋은 채찍이기도 했다. 적은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나를 키우기도 한다. 그 아이에게도 내 존재가 적잖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어쩌면 그 아이도 나를 경쟁자로 삼고 내달렸을지 모른다. 나와의 인연이 상처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살아갈수록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에 감탄하게 된다.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과 사건들이 고마운 대상으로 결론지어지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해자라고 여겼던 이들이 은인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사건에서 내가 가해자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드니까 판단을 유예하고, 사건의 추이를 가만히 지켜보게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것에서 좋은 면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화하고 언젠가는 사라진다. 젊었을 때는 변화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움직이는 동사가 아닌 고정된 명사로 세상을 인식했다. 나이를 먹으면 세상이 시간이라는 열차를 타고 달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흐르는 인생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 충실한 것뿐이다. 지금 좋은 일로 생각되면 계속하고, 나쁜 일이면 좋은 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고, 그 결과는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에 따라 그 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