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보다

19. 정의와 분노

by 바보

그곳에서는 정말 못된 인간들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직장에서 몰아내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있는 동안은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이 피해를 볼 게 뻔했다. 그러나 열 포졸이 도둑 하나 못 잡는다는 속담처럼 못된 인간을 상대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젊은이들은 그 못된 인간들을 쫓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나이 든 이들은 적당히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보면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에서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젊은 나이였던 나는 그 직장의 나이 든 사람들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중립을 지키는 비겁한 자들로 규정했다. 세속에 닳고 닳은 그들을 나는 무시하고 불신했다. 순수하고 정직한 젊은이들이 세상을 다스린다면 세상이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은 나이가 많은 이들이었다. 젊은 동료 중에서도 승진을 목표로 하는 이들은 그 못된 인간들에게 알랑거렸다. 나는 그들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자유, 민주, 정의라는 글자가 곳곳에서 출렁이고 데모가 끊이지 않는 시기에 나는 젊은 날들을 보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휴교령이 내려지던 시기에 대학생이었고,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글귀를 일기장에 적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시위를 하던 젊은이들이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직장을 다녔고, 미국의 참회와 속죄를 위해 기도합시다, 하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성당엘 다녔다. 세월이 흐르고, 그 시절 날마다 길가에 세워져 있던 닭장차와 전경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화염병도 사라졌다. 그러나 젊은 날 우리를 설레게 했던 자유, 민주, 정의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그것과는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것으로 끌어들여 사용하면서 오염이 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아야 했다.


나는 비교적 선과 악에 예민하게 반응했으므로 자주 분노했다.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착오가 있을 거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악을 미워하고, 악에 분노하면서 지냈다. 정의는 분노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부정과 불공정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라고 생각했으므로 내 분노의 감정은 정당하고 도덕적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에 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민주화에 성공하여서 더 이상 격렬한 사회적 분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가 되기도 했다. 분노하는 내가 대견하거나 자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 비도덕적으로 여겨졌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거나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수치심이 일어났다. 어느덧 나는 분노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선과 악의 경계가 자주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선이라고 여겼던 것에 악이 스며있고, 악에 선이 들어 있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교과서에 ‘마하트마 간디’가 수록되어 있었다. 간디의 훌륭한 점을 나열한 문장을 읽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느닷없이 돌발적인 발언을 했다. “에이, 이걸 어떻게 믿어요? 선생님이 간디를 만나 봤어요?” 나는 어리둥절해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사람은 겪어 봐야 안다고.” 그 아이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교실을 나왔는데 그 질문은 내게 상당히 충격을 주었다. 한 번은 남학생반에서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잖아요. 살인을 했는데.” 하는 말이 나왔다. 그 아이의 주장에는 그 학급 아이들이 즉각 응답했다. “저 자식, 일베래요.” 아이들은 그 아이에게 눈총을 주었고 일베로 지목된 아이는 겸연쩍게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직장에서 물러나고,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에서 놓여나게 되면서, 나는 지난 시간을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옳고 그름이 강했던 만큼 남에게 상처를 준 경우가 많았다는 게 크나큰 후회로 다가왔다. 정의와 불의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정의가 지나쳐서 폭력이 되는 지점에 나는 가끔 서 있었다. 그때는 그게 올바르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게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했을 것들이 그 시간에서는 그것이 옳은 것이었다. 나는 많은 것들을 후회하고 자책했다. 젊었을 때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생각났다. 악인을 처단한다는 생각으로 살인을 저질렀지만 죄책감에 무너지는 주인공의 복잡한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전에는 주인공이 느껴야 했던 번뇌와 고뇌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줄거리로만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었다.


젊은 날 그 직장에서 만났던 못된 인간들 중에서 악명 높았던 한 명은 전근을 간 곳에서 쫓겨났다. 그곳 젊은 선생들이 끈질기게 그의 비리를 추적하여 그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슬금슬금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 무사히 정년퇴임을 했고, 그들의 시중을 들었던 내 연배의 젊은 한 사람은 내가 직장을 떠날 때까지 아직 승진 중이었다. 그녀는 남들을 해치면서, 부정을 저지르면서, 나쁜 소문 속에서도 승진의 길을 갔다. 마침내 못된 짓이 탄로가 나서 그의 마지막 승진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듬해 스승의 날에 그가 표창장을 받았다는 뉴스를 지역 신문에서 읽었다. 그녀가 그 표창장을 어떻게 받아냈을지 짐작이 갔다. 그 표창장으로 그의 부정행위는 면제를 받고 다시 승진의 길이 열렸다. 다른 몇몇 사람의 비리도 나는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을 보면서 부끄러운 짓을 벌일 수 있는 그들의 일그러진 용기에 감탄인지 탄식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경탄이 나왔다.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파렴치하게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놀랍기만 했다.


정의와 분노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분노 없이 정의가 가능한가? 분노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왜 착한 것 속에 나쁜 것이 들어 있는가? 독립군이 일본 놈을 죽인 것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 그 질문들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고 싶었다. 여기저기 온갖 곳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에서는 선과 악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좋고 나쁨을 초월한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도 된다. 똑같은 칼도 의사가 쓰면 좋은 것이 되고, 강도가 쓰면 나쁜 것이 된다. 세상에 정해진 법은 없다. 같은 것이 인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은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일본 사람이 나쁜 놈이라서 개인적인 보복을 위해 죽였다면 살인이다. 그러나 일본 놈이 한국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니까 한국인들을 살리기 위해 일본 놈을 죽였다면 그것은 훌륭한 행위이다.


전쟁의 역사는 정의의 역사라고 한다. 전쟁에서는 나와 다른 상대를 나쁜 놈으로 악마화해서 그를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성급하게 상대를 나쁘다고 판결해서 악마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틀렸다는 관점이 아니라 나와 다르다는 관점에서 상대를 보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분노에 자비로운 마음이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은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분노하는 능력, 역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옳고 그름이 달려있다. 분노의 노예가 되어 때에 맞춰 사용하지 못할 때는 분노가 문제가 된다. “화를 냈다고 자신에게 벌을 주지 마라.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능력을 썼을 뿐이다. 다만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하는 설법을 들었을 때 적잖은 위안을 받았다. 화를 내며 미숙하게 행동했던 나의 어설펐던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받았다.


노년의 나는 세상을 보는 눈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젊은 날의 나와 확연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내게 다가오는 것들에 정신없이 대항하며 살았다면, 이제는 세상에서 떨어져 멀리서 바라보며 살아간다. 세상 속에서 살 때는 핏대를 올리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화를 조절하지 못해서 실수도 하고 손해도 보면서 살았다. 나이가 많은 지금의 나는 나쁜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쓰며 살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재미있게 살고자 한다.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인 사람들은 늘 있는 것이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항상 있는 것이다. 내가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나이 든 이들을 비난했던 젊은 날의 눈으로 지금의 나를 본다면 한심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젊은이의 태도와 노인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불의에 맞서는 젊은이들의 즉각적이고 도전적인 표현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순발력과 행동력이 사회를 병들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나에게 노인이 된 내가 조언을 한다면, 화를 내지 않는 상태에서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다. 화를 내지 않으면서도 불의를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젊었을 때 나는 그런 길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돌멩이나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싸워야 했던 사회 분위기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노래하고 춤을 추며 시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쁜 사람들은 무조건 물리치고 처벌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르침의 대상, 교화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다. 물론 나쁜 사람들을 방치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악마는 인간 밖에 있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분명하게 부정의, 불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불의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은 자유롭고 평화로워야 한다. 그래야 혼란한 세상에서 정의로우면서도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다. 증오와 미움과 분노에 내 영혼이 잠식되어서는 내가 피폐해질 뿐 아니라 정의도 바로 설 수 없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도 가까이 보면 더럽지만 멀리 보면 아름답다. 젊은 날의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더라면 덜 괴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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